블로그 4주년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는 30대 초반이었는데, 블로그 생활과 더불어서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준비도 하지 않았던 시험에서 성적이 상당히 좋게 나와서, ‘난 세상이 선택한 천재야!’라는 중이병에 걸린 적도 있지만. 이른 시절에 받은 아이큐 테스트에서, 제 지적 재능 수준은 정규분포 가운데 있다는 사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제게 하늘이 허락한 천재성이 없음으로 노력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 인생의 모토로 삼는 사자성어는 ‘대기만성’입니다. ‘대기만성’을 나쁘게 표현하자면, 가늘고 길게 살자로 보일 수 있지만. 영원히 현역에 남아서 일하고 싶은 게 꿈이기에, 한시절 주목받는 홈런타자보다 꾸준히 2루타를 쳐내는 성실한 타자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2루타를 꾸준하게 쳐낸다는 게, 철저한 자기관리 없이 힘들죠. 따라서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꾸준히 하려는 게 생활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블로그도 이런 습관 때문에 4년을 유지한 듯합니다. 그렇지만 ’대기만성’이 삶의 모토여도, 블로그를 4년 동안 이어오는 것은, 노력만이 ‘생존전략’인 엔지니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듯한데요. 그럼 꾸준함 말고 무엇 때문에, 저는 글을 계속 쓰는 걸까요?
회사생활에 쫓기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싶은 상황에서, 꾸준히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척박한 엔지니어링 문화를,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역사적 사명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요.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대의명분은 제게 없는 듯합니다.
한동안 멋진 이유를 생각했지만, 마음이 끌리는 대답은 글쓰기가 ‘그냥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가 재미있다고 해도, 과자봉지를 가슴에 품고 쇼파에 몸을 맞긴 채 미드를 보듯이, 그런 편한 재미만 있지는 않습니다. 가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과 키보드에서 튀어나는 글자가 싱크되지 않아서, 글을 쓴다는 게 정말로 짜증나는 일일 때도 있지만요. 그런 지겨움과 지난함 속에서 글을 쓰는 건, 쓰고 나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유치한 글이지만 예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 봅니다. 푸른 초원을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목민은 안장 위에서 초지를 응시하고, 자연의 보답에 기뻐하는 농부는 비단보다 부드러운 황토 위에서 대지를 관조하며, 덤프 트럭 기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삶의 고단함이 깔려 있는 도로를 쳐다 봅니다. 그리고 개발자는 17인치 모니터를 통해서 세상을 프로그램합니다.
8비트 MSX 컴퓨터의 마력에 빠졌던 컴키드는 어느새 컴퓨터로 일용할 양식을 얻는 샐러리맨이 되었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세계관을 지배하듯이, 30년 이상을 취미와 직업으로 접했던 컴퓨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역학 관계는 프로젝트 팀원 사이의 정치로 파악하고, 삶의 주기는 프로젝트 주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로 컴퓨터와 나누는 대화는 외국인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 쓰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글을 써서 물질적으로 얻는 것은 없지만, 내가 쓴 짧은 글이 누군가의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글쓰기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매력에 대해서 생각하다, 글쓰기는 바이러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불특정 다수의 컴퓨터를 감염시켜서,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해당 컴퓨터에 악의적인 영향을 주는게 목적입니다. 물론 글쓰기의 목적이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해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메카니즘과 글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전파되는 메카니즘이 동일하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떤 책은 사고 체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읽자마자 금방 잊혀집니다. 그러나 가끔씩 우연이 접한 글이나, 마음 먹고 읽은 대사상가의 생각에 빠져서 사고 체계가 온통 저자의 생각으로 점령 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강력한 바이러스가 운영 시스템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요. 이런 글을 만나면, 저자의 생각에 압도 당해서 어느 순간에는 내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고 체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몇 년에 한번 씩 출몰하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백신으로도 쉽게 치료되지 않는 것처럼, 사고 체계를 점령한 글은 쉽게 지워 버릴 수도 무시해 버릴 수도 없게 됩니다.
강력한 바이러스가 시스템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을 조금 더 완성에 가깝도록 만듭니다. 즉, 바이러스가 파고 들었던 시스템 취약점은 분석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기술과 패치가 적용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한동안 사고를 점령했던 글은 어느새 사고 체계로 흡수됩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 완전해 보여서 내가 가졌던 논리와 세계관을 대체하기도 하지만, 기억이라는 특수한 경험과 결합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고 튼튼한 나만의 사고 체계를 만들어 줍니다.
조금은 늦게(?)… 글쓰기의 매력에 빠진 이유는 강력한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을 꿈꾸는 치기 어린 해커(혹은 크래커)의 본능이 아직도 제 가슴 속 어딘가에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욱 강력한 바이러스를 꿈꾸며,
그렇습니다. 내일도 그리고 아마 먼훗날에도, 불꺼진 통근버스 안에서 멋진 아이디어가 생각나 충혈된 눈으로 핸드폰에 메모를 남기거나, 가족들이 잠든 새벽에 피곤한 몸이지만 컴퓨터를 켜고 글을 남길 것은, 강력한 바이러스를 만들면 좋지만, 그런 목표 의식이 없더라도 글쓰기가 그냥 재미있기 때문일 겁니다.
# 덧: 사실 제 블로그는 읽기전용 블로그에 가깝죠. 그런데도 가끔 댓글로써 제 가슴에 파문을 크게 남겨주시는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물론 댓글을 남겨주시지 않더라도, 꾸준히 방문해서 읽어 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image from http://www.flickr.com/
* 물론 EQ, SQ, 다중지능도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잘 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November 14th, 2009 at 3:57 am
4주년 축하드립니다. 꾸준히 뭔가를 할 수 있다는건 6개월마다 전혀 새로운 일을 벌이는 저 같은 사람 입장에선 무조건 대단한 겁니다.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
November 14th, 2009 at 10:37 pm
4주년 축하드립니다! ‘도와주세요! 팀장이 됐어요’를 도서관에서 빌려 봤는데, 참 좋더군요.
November 14th, 2009 at 10:50 pm
4주년 축하드립니다.
블로그 운영하다보면 슬럼프(?)가 오게 마련인데 4년이나 꾸준히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내용도 재미있고, 유익하구요.
계속 좋은 내용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November 15th, 2009 at 12:17 am
4주년 축하드립니다. 요즘들어 꾸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복 받으신거죠
앞으로도 재미있는 꾸준히 부탁드립니다.
November 16th, 2009 at 12:44 pm
꾸준히 4년을 유지해오셨다는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RSS 피드가 밀리면 다른 블로그는 대충 ‘모두 읽음’ 처리하는데 Hani님 포스트는 꼭 읽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November 16th, 2009 at 3:49 pm
4주년 축하 드립니다. 댓글을 자주 남기지는 않지만(거의 안남기지만 -_-) 꾸준히 구독하고 있습니다.
November 16th, 2009 at 8:38 pm
mepay님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하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악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요.
:)
형근님
감사합니다. 잦은 업데이트로 보답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wafe님
꾸준하게 써서 10주년도 되고, 20주년 되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이헌규님.
꼭 챙겨서 읽어 주시다니,
정말 큰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찍는 사진’님
그냥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November 17th, 2009 at 8:55 am
이런, 축하가 한발 늦었네. 짝짝짝. 글쓰기가 “그냥 재미있기 때문”이란 말이 듣기 좋군. 글 읽는 작은 기쁨을 줘서 고맙네 그려. 앞으로도 쭉~ 즐거운 글쓰기 하시길…
November 17th, 2009 at 11:21 pm
형. 고맙습니다.
송년회 해야죠.
November 20th, 2009 at 2:49 pm
축하해요,그리고 재미있는일 계속 즐겁게 해나가시길 바래요
November 21st, 2009 at 8:45 pm
고마워요.
November 23rd, 2009 at 2:30 pm
4주년 축하드려요! 추진력은 있되 지구력이 없는 저와는 정말 다르네요. ㅋㅋ 성실한 2루타자가 결국 홈런타자를 능가하는 거겠죠. 앞으로도 유익한 글 기대할게요.
November 24th, 2009 at 7:28 am
티아이피님
성실한 2루타자가 홈런타자를 능가한다,
기분 좋은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November 27th, 2009 at 2:30 pm
축하,,,한 아름~.
그냥 글쓰기가 재밌다…
크~ 글쟁이들이 흔히 하는 말을 하시는구려.
계속 건필하시길…건강하시고…
November 28th, 2009 at 11:33 am
글 좋아하는 공쟁이라 생각했는데. 글쟁이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