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스타 갤럭티카
제가 봤던 미드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트윈 픽스’입니다. 트윈픽스의 줄거리는 큰 틀에서 매우 간단합니다. 외딴 시골 마을에서 로라라는 여고생이 살행되면서 살인범을 수사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인데요, (제 생각엔) 요즘 유행하는 미드의 공식인 떡밥 신공이 이 드라마에서 처음 선보인 듯합니다.

영화 트윈 픽스
이 드라마의 감독이자 컬트 영화의 거장인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드라마에서 널려 놓은 떡밥이 지나치게 많아서, 드라마에서 모두 풀어내지 못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영화도 만들었습니다. 저도 드라마 열혈팬으로서 극장판 트윈픽스를 봤는데요, 문제는 영화에서 누가 로라를 죽였는지 알려 주면서 다시 수많은 떡밥을 양산했다는 데 있습니다.
완결성을 원하는 팬들이라면 그런 떡밥들이 짜증나지만, 열린구조를 좋아하는 저로서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가 있는 트윈 픽스는 뇌리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트윈 픽스 이후로 X파일이나, 24, 닥터하우스 등. 재미있는 드라마를 여러 편 봤지만, 그래도 트윈 픽스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 드라마는 아직 없었죠.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주전투를 담은 동영상을 봤는데, 기존 우주전쟁 장면과 달리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게 매우 신선했습니다. 그 동영상의 출처를 알아보니 SF미드 ‘배틀스타’였습니다. 전투장면에 이끌려서 ‘배틀스타’를 보기 시작했는데요, 매회 “참 잘 만들었다!”하고 감탄하는 어느새, 마지막편까지 다 봤습니다.

배틀스타 갤럭티카
SF장르가 아이들의 장난거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궁극의 SF는 현실을 반영하는 최고의 은유라는 이야기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눈요깃감을 뛰어넘어 현실의 문제점이나 이슈를 잘 담아낼 때, SF영화나 드라마는 “참 잘 만들었다!”하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웰메이드 미드입니다.
스토리 자체의 완결성은 당연한 것이고, 이 드라마에서 유일신, 윤회사상, 민주주의, 테러, 인종문제, 인간과 기계 등 참 다양한 주제를 다뤘는데요, 그 주제가 얼마나 다양하고 깊었던지 배틀스타에 나온 출연진들이 UN토론회에 참석해서 연설까지 했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후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인간의 방어 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들어서 기계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한, 발터 박사가 시즌4, 9편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발터 박사 옆에는, 기계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인류를 ‘지구라고 불리는 곳’으로 인도하는 로슬린 대통령이 있었죠.
말 많은 발터 박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는지 유언 비슷하게 ‘자기 때문에 인류가 멸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통령에게 말합니다. 대통령은 이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나머지, 발터 박사의 상처를 감쌌던 붕대를 풀어 버리죠. 그도 그럴 것이, 그 발터 박사 때문에 인류가 대부분 죽었고, 생존한 사람들도 말로 표현 못할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터 박사가 피를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이 대통령의 자의식 속에서, 멘토가 대통령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발터가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문제는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게 어려워질수록 생존권을 인정하는 게 중요해진다는 점이에요. 인류가 스스로 생존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한사람 한사람마다 할 수 없죠. 나쁜 사람에게도 착한 사람처럼 죽음은 엄청난 것이죠.
이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는 논지는, 영화 ‘데드맨 워킹’이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말하는 주제와 비슷합니다. 즉 죽일 짓을 한 범죄자들이라도 그 죄를 ‘사형’이라는 방법으로서 인간이 심판하는 게 온당하느냐는 것이죠. 물론 이런 주장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도, 범죄자들이 저지른 죄만 놓고 보면 “사형만은 거두자!”하는 의견을 개진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SF드라마에서 건들기 어려운 주제를 시나리오에 풀어내는 제작진의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November 23rd, 2009 at 4:26 pm
제 인생 최고의 미드였어요 ㅠ.ㅠ
November 24th, 2009 at 7:27 am
다 보고 나니, 다 봤다는 아쉬움이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