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The Man
오랜만에 연극 한편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연극이 작년 여름에 본 라이어였으니까 근 일년만에 연극 관람이다. 오늘 본 연극은 김태훈 연출, 유오성 주연(오이디푸스 역)의 오이디푸스 The Man이다. 내용이야 초등학생도 알 정도로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 이야기다. 뭐 오이디푸스야 쉽게 말하자면 프로이드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잠재적인 후레자식으로 만들어 놓은 원흉이지만, 잘 알고 있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진짜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연극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면…
어머니와 결혼하고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신탁에 의해 고향을 떠나 ‘테베’라는 도시로 오는 도중 오이디푸스는 늙은 노인 일행을 만나게 되고 작은 시비 끝에 그들을 죽이게 된다. ‘테베’에 도착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 인해 재앙에 빠진 ‘테베’를 구하게 되고 왕비인 이오카스테와도 결혼해 테베의 왕이 된다. 그리고 수십 년의 흐른 뒤 ‘테베’에 역병을 돌면서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찾아야 ‘테베’를 구할 수 있다는 신탁에 따라 과연 누가 범인인가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의 순리대로 살자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결국 오이디푸스 자신이 저주 받은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남근을 거세해 스스로를 벌하는데..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해서는 신화속의 영웅들 - 오이디푸스를 참조하자.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다. 그런데 실상 오이디푸스가 패륜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 라이오스가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부인을 취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신탁이 실현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발목에 못을 박고 산에 버렸기 때문이다.(오이디푸스는 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발에 못이 박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죄만 놓고 본다면 돌로 쳐 죽일 놈이지만, 구지 오이디푸스의 원죄를 묻자면 태어난 죄밖에 없다. 연극 내내 시련을 겪던 오이디푸스를 보면서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은 “오이푸스는 전생에 무슨 지은 죄가 저리도 많아서 고생을 할까?”였다. 물론 문화적으로 보자면 전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이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게 전생의 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단지 그리스 신들의 장난일까? 물론 그리스 신들은 예수나 알라처럼 유일신이 아닌 감정을 지닌 신이기 때문에 충분히 장난을 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오이디푸스의 현실을 보면 너무나 가혹한거 같다. 거기에 마지막에는 남자의 중요한 부위까지 자르는 고통까지…(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죽는 것만으로는 형벌이 가볍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참회의 길을 떠난다.)
오이디푸스가 겪는 괴로움의 근원이 단순히 신탁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시련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연극을 보기 전까지는 오이디푸스 full story version을 잘 몰랐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놓치고 있는 사실은 없는지, 집에 돌아와 오이디푸스로 검색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이 없다.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라이오스가 젊은 시절 펠롭스 왕의 막내아들을 너무 사랑한(hani 주 : 최초의 남색이었다고 한다.) 나머지 납치했다가 죽이면서 펠롭스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동성애가 낳은 비극이었다. 제우스의 손자이기도 한 펠롭스는 신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빌었으며, 소년을 보호하는 신 아폴론은 그 소원을 귀담아 들었다. 하여 아폴론은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뒤 찾아온 라이오스에게 신탁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갖지 말라. 만약 신의 뜻을 거슬러 아들을 낳을 경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 full story
라이오스가 저지른 동성애에 의해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하는 동서고금의 패륜의 시초가 되었다. 물론 동성애 코드에서 오이디푸스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 근원에는 인간의 타락한 욕망 때문이다. 고전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롭게 무대에 올려지는 이유는, 날로 발전하는 문명 뒤에 인간의 본성은 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거 부자건 거지건 비슷하고… KTX타고 부산 가건 걸어서 한양 가건 예나 지금이나 싸우고, 질투하고, 좌절하고, 슬퍼하는 것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한 줌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빌어먹을 나약한 육체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싸우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괴로워 하다 죽을 것이다.
뻔한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걸 보면 내가 나이 먹었다는 증거다. 수중전, 공중전에 우주 전쟁까지 치룬 인생 선배들이 보면 웃을 이야기지만, 남의 돈 벌어먹고 산지 9년이 흐른 이 시점에 인생 산다는게 뭐 있어라는 말에 한편으로 부정을 하기도 하지만, 벽에 부딪힐 때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사람 사는게 거기서 거긴거 같다. 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확신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지만 수 천년 전의 오이디푸스의 얼굴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걸 보면, 영혼에 대한 확신성과 내 자신의 유일성은 한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찌르고 떠난 오이디푸스처럼 쉬운 죽음을 택하지 않은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속물 근성을 버리려는 자기 반성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쓸쓸한 오이디푸스의 뒷 모습 속에서 한 남자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모습이 중첩되는 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반복 상영하는 동시 상영관의 모습을 지닌 인생이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