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바이러스다.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 봅니다. 푸른 초원을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목민은 안장 위에서 초지를 응시하고, 자연의 보답에 기뻐하는 농부는 비단보다 부드러운 황토 위에서 대지를 관조하며, 덤프 트럭 기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삶의 고단함이 깔려 있는 도로를 쳐다 봅니다. 그리고 개발자는 17인치 모니터를 통해서 세상을 프로그램합니다.
8비트 MSX 컴퓨터의 마력에 빠졌던 컴키드는 어느새 컴퓨터로 일용할 양식을 얻는 샐러리맨이 되었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세계관을 지배하듯이, 30년 이상을 취미와 직업으로 접했던 컴퓨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역학 관계는 프로젝트 팀원 사이의 정치로 파악하고, 삶의 주기는 프로젝트 주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로 컴퓨터와 나누는 대화는 외국인과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 쓰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글을 써서 물질적으로 얻는 것은 없지만, 내가 쓴 짧은 글이 누군가의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글쓰기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매력에 대해서 생각하다, 글쓰기는 바이러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불특정 다수의 컴퓨터를 감염시켜서,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해당 컴퓨터에 악의적인 영향을 주는게 목적입니다. 물론 글쓰기의 목적이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해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메카니즘과 글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전파되는 메카니즘이 동일하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떤 책은 사고 체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읽자마자 금방 잊혀집니다. 그러나 가끔씩 우연이 접한 글이나, 마음 먹고 읽은 대사상가의 생각에 빠져서 사고 체계가 온통 저자의 생각으로 점령 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강력한 바이러스가 운영 시스템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요. 이런 글을 만나면, 저자의 생각에 압도 당해서 어느 순간에는 내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고 체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몇 년에 한번 씩 출몰하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백신으로도 쉽게 치료되지 않는 것처럼, 사고 체계를 점령한 글은 쉽게 지워 버릴 수도 무시해 버릴 수도 없게 됩니다.
강력한 바이러스가 시스템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스템을 조금 더 완성에 가깝도록 만듭니다. 즉, 바이러스가 파고 들었던 시스템 취약점은 분석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기술과 패치가 적용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한동안 사고를 점령했던 글은 어느새 사고 체계로 흡수됩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 완전해 보여서 내가 가졌던 논리와 세계관을 대체하기도 하지만, 기억이라는 특수한 경험과 결합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고 튼튼한 나만의 사고 체계를 만들어 줍니다.
조금은 늦게(?)… 글쓰기의 매력에 빠진 이유는 강력한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을 꿈꾸는 치기 어린 해커(혹은 크래커)의 본능이 아직도 제 가슴 속 어딘가에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욱 강력한 바이러스를 꿈꾸며, 오늘의 post를 마칩니다.


July 5th, 2006 at 4:01 am
멋진 비유에 공감합니다.
July 5th, 2006 at 8:15 am
찰리님.
글쓰기는 쓸수록 매력적입니다.
September 19th, 2008 at 6:01 pm
하니님 글 ..^^ 매력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September 22nd, 2008 at 9:40 am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