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프로그래밍

저는 김훈씨의 소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구성이 뛰어나거나, 내용이 재미있어 그를 최고의 작가로 꼽지 않습니다. 너무나 담백하여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의 명료한 ‘문장’ 때문입니다.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 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버려진 말이 길게 울었다.
 말 울음소리가 빈 강을 건너왔다.

남한산성 中

위의 구절은 김상헌의 심리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청의 군대를 안내하고 끼니라도 때우겠다는 사공의 처지, 백성들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신하된 도리를 지키려는 선비의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입니다. 김훈의 문장이 단문위주로 구성되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전체 글 속에서 문장을 읽어야 글의 참맛을 알 수 있다는 한계도 있지만.

이런 문장들이 지닌 강한 필력 때문에, 저는 김훈씨의 글을 최고로 여깁니다.

어떤 분야든지 도의 경지에 이르면 세상만사에 통달한다는 것처럼, 김훈씨의 글은 리팩토링이 너무나 잘 된 대가의 코드와 비슷합니다.

블로깅을 처음 할 때, 생각을 어떻게든 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프로그램을 짤 때 알고리즘을 코드로 구현하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글쓰기가 손에 붙자, 좋은 글은 멋진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 이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글이 담고 있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글 자체가 지닌 형식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즉, 퇴고의 중요성입니다.

코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코드가 지닌 매력은, 그 코드가 담고 있는 알고리즘의 독창성 이상의 것입니다. 즉, 군더더기가 없고 너무나 단순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의 명료함이 아름다운 코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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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

This is Hani! My job is consulting, system design and project management... Sometimes coding. I hope you have a great time on my blog.

4 Responses to “글쓰기와 프로그래밍”

  1. 하니가모 Says:

    오호~~ 제가 쓰고 싶었던 내용인데, 멋지게 쓰셨네요…. 제 작업실 벽에 김훈씨의 티셔츠가 있습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김훈-” ^^

  2. Hani Says:

    하니가모님.
    감사합니다.
    김훈씨 티셔츠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

  3. duru Says:

    그렇죠? 김훈의 글에는 피냄새가 납니다. 예전에 어느 특정대에게 ‘니들이 뭘알아?’라고 일갈할 때, 검객의 모습을 스치듯 잠깐 봤습니다. 섞이지 않고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지않은 모습…저도 좋아합니다.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ㅋㅋ

  4. Hani Says:

    duru님.
    김훈아버님이 무협소설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duru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김훈의 글에서
    피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특히 ‘칼의 노래’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구요.

    김훈씨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저도 김훈이라는
    작가 전체를 좋아하기 보다는 글의 필력을 좋아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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