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와 ‘행동유도성’ 2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인에게 제우스는 판도라(Pandora, 모두의 선물을 받은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 다음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예쁘게 생긴 조그만 상자 하나를 건네주면서 절대로 열어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거듭 다짐을 받은 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다 주었다.
일찍이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으러 코카서스산으로 끌려가기 전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앞뒤를 재지 못하고 덥석 그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다. 그리하여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어 지상에서 살게 되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판도라는 제우스가 절대로 열지 말라던 조그만 상자가 생각났다. 그녀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궁금했다. 참다 참다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여 그 상자를 살짝 열어보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그때까지는 없었던 온갖 재앙과 질병이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재빨리 상자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상자 속에 들어있던 것은 다 날아가고 단 하나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
어릴 적,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말세 직전의 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현상에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판도라 여사’가 떠올랐다. 이런 고민은, 호기심 많았던 ‘판도라 여사’가 제우스가 준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젓과 꿀이 흐르는 곳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을까라는 쓸데없는 상상으로 끝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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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유도성(affordance)이란, 사물의 지각된 특성 또는 사물이 갖고 있는 실제적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속성을 말한다. 의자는 받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러기에 앉을 수 있다. 물론 의자는 운반할 수도 있다. 유리란 들여다볼 수도 있고 깨트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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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유도성은 사물을 어떻게 다루면 될 것인가에 관한 강력한 단서를 제공한다. 문에 붙은 편편한 금속판은 밀기 위한 것, 손잡이는 돌리기 위한 것, 홈은 물건을 끼워넣기 위한 것이며 공은 던지고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과 인간심리, 도널드 노먼, 학지사
위대한 도널드교수님께서 잘 정리해 놓으신 것처럼, 행동유도성은 사람의 행동을 자극하는 사물의 속성이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폭죽에 ‘사람에게 겨냥해선 안 된다는 경고문’을 붙여 놓아도, 푹죽이 지닌 자태가 인간 깊숙히 자리 잡은 ‘지향사격’이라는 행동유도성을 일깨워 동료에게, 친구에게 폭죽세례를 하게 만든다.
이쯤에서 ‘상자를 연 판도라’와 ‘폭죽을 동료에게 쏘는 사람’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바로 ‘행동유도성’이다.
제우스의 원래 의도는 인간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첫째, 판도라가 안전하게 상자를 운반해야 한다. 둘째, 적당한 시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쉬어야 한다. 만약 제우스가 편집증이 걸린 디자이너라고 해보자. 즉, 안전성만을 고려하여 ‘지문 인식’에 ‘홍채 인식’이 가능한 금고에 질병을 담았다면, 백치미 가득한 ‘판도라 여사’는 아무리 궁금해도 금고를 열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질병과 악이 쉽게 퍼지도록 깨지기 쉬운 유리함 비슷한 것에 담았다면, 아무리 백치미 가득한 판도라라도 유리함을 받지도, 받았더라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좋은 디자인의 단초 하나를 얻는다. 설계자가 의도한 기능성과 이 기능성에 맞는 행동을 사용자가 하게 만들기 위해서,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행동유도성을 내포해야 한다. 뻔한가?
그러나 간단한 폭죽 조차도 인간이 남용하거나, 오용할 수 있는 행동유도성이 숨어 있는데, 우리가 만드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난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나 우리 팀원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보지 못해서 안달날 정도로 사용하기 편하고 기능성이 높길 바란다. 그러나… 내 경험상 이렇게 단순한 것이 쉽지 않았다. 즉, 단순한 것과 쉬운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