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시스템은 왜 형편없을까?

몇년 전, 대형 SI회사에서 사내 ERP시스템을 교체했을 때 일입니다. 제가 그 회사에 근무한 것도 아닌 데 사내 ERP시스템을 교체한 것을 알게 된 이유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ERP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출장정산 프로세스도 변경되었습니다. 원래 시스템에서는 출장을 다녀온 다음, 시스템에 사용한 금액을 입력하고 경비 증빙서류(주로 영수증)를 회계팀에 제출하는 것으로 출장정산 업무가 끝났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법인카드를 사용해서 모든 경비를 사용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에, 사용한 금액과 카드승인번호 정도만 입력하면 정산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시스템이 변경된 이유는, 회계를 투명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영수증 제출 등의 비부가치 업무를 제거하자는 등의 좋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형 SI회사는 이런 목적 등을 홍보하면서 바뀐 ERP시스템을 잘 사용하도록 독려하는 이벤트도 잊지 않았죠.

뭐…… 여기까지 읽고나면 동화속 왕자공주 커플처럼, 시스템이 오픈되고 모두의 축복을 받으면서 사용자들이 행복하게 시스템을 사용했다는 아름다운 결말이 예상되지만. 모든 SI 공포영화처럼, 이 프로젝트에서도 분쇄기에 갈려서 털뭉치로 변한 처키가 다시 살아나 사용자들을 잡아 먹어버려답니다.

즉, 새롭게 오픈한 ERP시스템을 이용해서, 출장처리를 하려면 반나절이 걸렸습니다. 물론 사용자들은 시스템이 불편하다고 항상 과장되게 토로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동안, 같이 일했던 SI직원들의 술안주거리는 새로 오픈한 ERP시스템이었습니다.

SI직원들끼리, 다른 동료가 멍청한 실수를 하거나 개발속도가 느리면

ERP스러운 놈*

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한달이 넘도록 새롭게 오픈한 ERP시스템을 이용해서 출장정산을 하지 못하자, 혹자는 회사가 경비를 대폭적으로 줄이기 위해서 ERP시스템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SI프로젝트처럼, 이 ERP시스템도 개발하신 분들의 눈물겨운 노력 때문에 정상화되었고, 현재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는군요.

이 에피소드를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은 왜 그렇게 형편없을까?

여러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37Signal가 제시하는 한 가지 이유는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을 도입하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설득력있는 의견입니다.

37Signal의 이야기를 애자일 관점에서 말하면,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은 도입이 결정되는 시점부터 이미 프래자일(Fragile)한 프로젝트입니다. 즉, 쓰는 사람과 돈을 내는 사람 사이에 분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성 면에서 예견된 실패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돈을 내는 사람을 유혹하는 쓸데없는 기능들로 채워진 엔터프라이즈 시스템이 도입됩니다. 정작 시스템을 사용하게 될 사람들의 의견은 프로젝트가 다 끝나고 나서 파악이 되죠. 남극과 북극 사이의 거대한 틈은, 한 사람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듯이. 온몸으로 체험하고 나서야 틈을 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들을 만들지 않는 묘안은 없을까요?

문제는 복잡해 보이지만, 해답은 단순합니다. 진짜 사용자의 의견에 귀를 쫑긋 세우면 됩니다. 오호, 간단한데……라고 생각이 들지만. 항상 말씀드리듯이, 간단한 것과 쉬운 것은 다른 것입니다.

관료화된 조직에서, 구매부서, 회계부서, 개발부서, 인사부서…… 기능조직으로 분화된 보이지 않는 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큰 회사에 시스템을 도입할 때는 이런 조직의 특성이 반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조직의 문제가 프로젝트에 투영된 채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사회공학적 현실입니다.

거대한 질량덩어리인 사회 구성원의 인식은, 관성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그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없다고 벼랑 끝으로 떨어지도록. 다시 벼랑에 건져서 다시 벼랑으로 달려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슬픈 현실이고, 무너지지 않는 벽이라도 현장에서 고객과 만나는 애자일한 우리들은, 회사 시스템 속에 내재된 이런 모순점을 간파하여 처키같은 시스템이 되지 않도록, 더 나은 세상으로 상변화를 일으키도록 조금씩 바꿔야겠죠.

Be Agile! :)

Over the wall

image from http://wikimedia.org

* 선의의 피해자를 없애기 위해서, 시스템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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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

This is Hani! My job is consulting, system design and project management... Sometimes coding. I hope you have a great time on my blog.

4 Responses to “회사 시스템은 왜 형편없을까?”

  1. 5throck Says:

    말씀하신대로 프로젝트에서 일을 할 때 사용자를 고려하기보다는 아무래도 프로젝트 대금을 지급할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다보니 발생하는 문제인데, 아무래도 말씀하신대로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

  2. zoops Says:

    와우~ 최근 읽은 글중에서 최고입니다.
    110% 공감 작열입니다.

    알고봤더니 애자일 프랙티스 변역하신분이시네요.
    책은 잘 봤습니다. ^^
    릴리즈잇도 당장 사서 봐야겠습니다. 번역자분의 안목을 믿고.. ^^

  3. hs Says:

    뭐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만, ‘대장간 집 부엌칼이 녹슨다’
    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우리 회사 mail 시스템도 완전
    suck 이다.

  4. Hani Says:

    5throck님,
    저도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탠드업 미팅을 이해시키는 것도 힘들 때가 많으니까요.
    :D

    zoops님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요. ^^

    hs
    친구, 그래 가끔 메일시스템이 배고파서
    메일을 먹을 때가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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