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과 소프트웨어 개발
며칠 전에 동료들과 맞벌이 부부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반씩 살림을 나눠서 하는 부부, 더 많이 일하는 부인, 가사노동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남편들도 있었죠.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삶의 지혜를 얻는 자리였습니다.
여자 동료분이 남편에게 빨래를 부탁하면, 남편은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고 세탁기를 돌린 다음에
여보, 나 빨래 다했어!
라고 말한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가사노동을 안 해 보신 분들은 대부분, ‘빨래는 세탁기가 해준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고백하건 데 저도 가사노동을 해보기 전에, 빨래는 세탁기가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세탁은, 세탁기를 돌린 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 업무 가운데 하나가 프로세스를 잡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직업적 소양을 발휘해서 세탁 프로세스를 살펴보죠.
세탁 프로세스
- 세탁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는 식구가, 물이 빠지는 새옷을 아무 생각없이 세탁물 바구니에 넣어두기도 하기 때문에, 세탁기에 옷을 넣기 전에 새옷을 골라내야 합니다. 새옷을 세탁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항상 조심해야 하죠. 한번의 실수로, 빨간색 팬티를 입고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세탁물을 분류한 다음, 세탁물을 정리해서 세탁기에 넣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옷을 뒤집어서 벗어놓는(그리고 세탁에 참여하지 않는) 식구들이 있기 때문에 뒤집어진 옷을 원래대로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옷을 제대로 뒤집지 않고, 세탁을 하면 빨래를 널을 때 뒤집어야 합니다. 젖은 빨래를 뒤집어 보신 분들은 알시겠지만, 뒤집으면서 작금의 사태를 불러일으킨 식구를 미워하게 되죠.
- 양말짝을 맞춰서 벗어놓겠다는 선의로, 양말을 벗어 돌돌 말아 공을 만들어 놓는 식구들도 있죠. 좋은 의도로 한 것이지만, 돌돌 말린 양말을 풀어서 세탁기에 넣지 않는다면, 세탁되지 않은 양말을 다시 신어야 합니다.
-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은 후 세탁을 시작하죠. 자동화된 드럼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탁이 끝난 다음 섬유유연제를 넣고 다시 한번 돌려주어야 하는 수작업 프로세스가 있습니다(이 작업은 세탁기 종류에 따라서 선택사항입니다).
- 빨래가 끝나면, 빨래 널기를 합니다. 이 작업도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죠. 우선 빨랫줄에 내려 앉은 먼지를 닦아내야 합니다. 먼지를 닦아내지 않고, 하얀 속옷을 널면 회색 줄무니가 쳐진 속옷을 입고다녀야 하기 때문이죠.
- 빨래를 널면서, 다림질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빨래를 펴서 널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속옷이라도 대충 입고 다녀도 되지만, 주름을 펴지 않고 말린 빨래는 잘 개어지지도 않습니다.
- 빨래가 뽀송뽀송 말랐다면, 이제 식구들이 입기 편하도록 갤 차례입니다. 빨래개기 작업을 하기 전에, 다림질을 할 빨래를 선별합니다. 다림질을 안 해도 되는 빨래들는 잘 갭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갠 빨래는 식구들이 입기 편하도록 옷장이나 서럽 속에 챙겨서 넣습니다.
- 마지막으로 다림질 프로세스가 남았습니다. 다림질도 상당히 숙련이 필요한 작업이죠. 아무튼 다림질을 끝내고, 옷걸이에 잘 걸어두면 세탁 프로세스는 모두 끝납니다.
적어 놓은 세탁 프로세스를 보니까 어떠신가요? 상당히 많은 작업이 필요하죠.
‘세탁을 안 해본 식구’나, ‘세탁은 세탁기라고 생각하는 식구’가 아는 세탁 프로세스는, 4번 항목에서 ‘세탁기를 돌린다’입니다. 하지만 세탁 프로세스를 다 겪어 본 사람은 ‘세탁기 돌리기’는 세탁의 시작일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상 만물의 이치는 통한다고 하죠.
새싹 하나에서 지구를 느끼고, 우주를 느끼기 위해서 앎이 필요합니다. 이런 앎은 경험에서도 얻고, 책을 통해서도 얻습니다. 책을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경험을 하지 않으면 온몸으로 어떤 것을 깨닫는데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소프트웨어도 그렇습니다. 이제 막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누군가는 ‘소프트웨어=개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빨래에서 세탁기 돌리기가 전부가 아니듯이, 소프트웨어 만들기에서도 개발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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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3rd, 2008 at 4:12 pm
정말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
February 23rd, 2008 at 5:15 pm
좋은 프로세스 이야기와, 좋은 비유네요
February 23rd, 2008 at 7:39 pm
5throck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Gloridea님.
칭찬 감사드립니다.
February 24th, 2008 at 1:16 am
저 같은 경우 빨래 돌릴 때, 벗어놓는 것조차 비협조적인 가족의 빨래는 돌돌 말린 채로 세탁기에 넣고 돌린 후, 돌돌 말린 채로 말려서, 돌돌 말린 채로 갖다주는 센스를 발휘하곤 합니다. ㅋㅋㅋ
February 24th, 2008 at 4:15 pm
intherye님.
빨래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빨래 바구니에 넣을 때 조심할 텐데요.
관심이라는 게 참 그렇습니다.
February 24th, 2008 at 7:12 pm
뒤집혀진 옷 부분에서 한 마디 하자면,
프린팅되어 있는 옷은 빨래망을 쓰거나 손세탁을 하시는 게 아니라면 뒤집어서 빨래하는 것이 좋습니다. 프린팅된 면이 직접 닿아 세탁될 경우 벗겨질 위험이 있거든요~
그리고 굳이 뒤집혀진 걸 젖은 상태에서 다시 뒤집는 것보다 빨래가 마른 뒤에 뒤집어도 되겠지요 (. . )a
February 24th, 2008 at 8:01 pm
윤수아씨님.
답글 감사드립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프로세스는
‘세탁 AS-IS 프로세스(현재 프로세스)’입니다.
세탁에 참여하지 않는 식구들이 존재하는 것을 가정한
프로세스죠.
프로세스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개선점이 존재하는 프로세스입니다.
1~3번 프로세스까지는 세탁물을 제대로 분류해서
세탁바구니에 담아놓는다면 필요없는 프로세스입니다.
따라서 ‘세탁 TO-BE 프로세스(개선 프로세스)’를
말씀드리면, 세탁에 참여하는 이해당사자들에게
세탁물을 제대로 분류해서 세탁과 빨래 널기가 용이하도록
교육을 실시해야겠죠.
이렇게 하는게 세탁에 들어가는 공수가 가장 줄어드는
방법일 것입니다. 아울러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세탁망은
섬유손상이 많은 것들을 함께 빨 때 유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