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 자율화와 광우병 집회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교문을 통과해서 현관에 들어가려면, 시멘트로 포장된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졸업할 때까지 그 길을 따라서 등교하고, 그 길을 따라 별을 보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아무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 길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고3 때 벌어진 일이란 건 확실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새벽, 6시 50분쯤. 교문에 들어서자 눈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대략 150미터가 넘는 비탈길을 따라서

두 발 자 율 화

라는 글자가 시뻘건 락커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월드컵 덕분에, 지금이야 빨간색이 자유대한민국의 색깔이 되었지. 당시만 하더라도 빨간색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파다했습니다. 어쨌든 ‘두발자유화’ 사건 때문에, 학교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조금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3학년은 대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 때문에, 상고머리 스타일로 머리를 기르고 다닐 수 있었지만, 1~2학년은 3센티미터의 스포츠머리라는 두발 제약을 받았습니다. 

사건 전날, 1~2학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두발 단속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학교 측에서는, 이런 두발 단속에 대한 분풀이로 1~2학년이 저지른 범죄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일벌백계 차원에서, 신속한 조치 두 가지가 내려졌습니다.

첫 번째 조치는, 두발 단속 다음 날 삭발을 하고 온 1~2학년을 모아서 취조 아닌 취조를 했다고 합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적으로 삭발을 한 얘들 가운데, 이런 짓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삭발하고 마음 좀 잡아보겠다는 1~2학년 중에, 이 사건 때문에 누명을 써서 고생했죠.

두 번째 조치로 전교학생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것도 참 희한한 발상인데, 3학년 반장들이 1~2학년 반장들을 모아놓고, 재발방지를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이디어를 내놓는 자리였습니다. 사실, 3학년들이야 마음대로 머리를 기르고 다녔기에, 어떻게 보면 교사와 같은 기득권층(?)이었습니다. 평소 전교학생회의와 달리, 교사 vs 학생의 분위기가 아닌, 3학년 vs 1~2학년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회의자리에 앉아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랜전 일이기에 정확하지 않지만, 지금의 사고로 표현을 하자면,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의 대결이랄까요? 두발을 마음대로 기를 수 있다는 기득권을 가진 3학년이, 교사를 대신해서 1~2학년의 두발 자율화 요구를 무마하는 모습. 아마도 그 전교학생회의 자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바라본 자리였습니다.

***

광우병 집회에, 십대들이 주축을 이룬다고 하네요. 놀기만 좋아하는 십대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혹자는 십대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스타가 광우병에 대해서 몇 마디 했다는 이유로 집회에 참석하는 빠순이 빠돌이라고 조롱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에 돌아 다니는 찌라시에 흥분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십대들의 이런 집회 참여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프랑스의 68세대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요?

정치가 뭘까요? 전 정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정치란 이익, 즉 밥그릇 싸움이고, 혼자서 그 밥그릇을 지키지 못하기에 패거리를 이뤄서 싸우는 것이고, 패거리 싸움이기에 계급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집회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십대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육시스템에서 십대들을 구원해줄 사람들은 십대 그들입니다. 입시학원들의 입장에서 십대는 돈줄이고, 정부입장에서는 국민연금에 돈을 대줄 인적자원이며, 자본입장에서는 코묻은 돈을 훑어먹을 마케팅 대상이며, 부모입장에서는 남의 새끼에 뒤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식입니다. 결국, 이런 사회구조, 교육시스템 속에서, 십대는 영원히 타자일 수 밖에 없죠.

제도권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십대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광우병 문제는 (그 진위와 상관없이) 잠재적으로 십대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집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듯합니다. 물론 십대들의 현실 참여가 일회성으로 끝날지, 이들의 목소리가 우리사회를 바꾸는 엔진이 될지 더 지켜볼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68세대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죠.

‘두.발.자.율.화’라는 치기어린 장난 수준에 머물던 제 고등학교 시절보다, 조금 더 희망이 보입니다.

* 정치이야기는, 이 포스트를 계기로 당분간 자제할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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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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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to “두발 자율화와 광우병 집회”

  1. hs Says:

    두발 자유화 사건을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들도 답을 모른다는거… 자기들도 그렇게 밖에 교육 받지 못했다는거…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는거… 정치적 이슈에서
    생각을 멀리한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답답한 가슴은 어쩔수 없구나…

  2. Max Says:

    정치이야기라는 생각보다는 사회이슈를 말씀하신것으로 이해되네요. 현재의 이슈를 쓰는건 훗날에도 기억할만한 꺼리(?)가 될꺼라 생각되어 지구요.

    윗글에 대해 아무런 정치적인(?) 거부감 없고, 잘 읽었습니다. :)

  3. 장림 Says:

    주위의 7080세대들이 청소년들을 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더군요. 그들도 한때는 민주화를 열망하던 세대들인데 이제 그들도 기득권층이라 그런걸까요? 좀 씁쓸합니다.

  4. Hani Says:

    친구.
    일상적이지 않은 것. 뭐 통상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
    TV속이 아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면 대부분 거북해 하잖아.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기성세대에서 진보가 죽었다고 해야할까나.
    조금 심각해지네. :)

    Max님
    항상 관심 가져주시고, 고맙습니다. ^^

    장림님
    ‘승자독식사회’나 우석훈씨의 ‘88만원세대’에서
    표현을 빌리자면, 세대간경쟁이 치열해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이 된 민주화세력과 20대 비정규직의
    대결 구도 속에서… 새로 들어선 정부의 소수입 덕분에
    변화의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5. 오렌지 Says:

    정부는 국민식탁을 미국쇠고기로 무단점거 해놓고, 집회좀 했다고 무단점거로 잡아가다니…

    불의에 저항하는 십대들! 대단합니다!!

  6. Hani Says:

    오렌지님

    10대들의 힘이 지금의 촛불시위에 원동력이
    된 셈이죠. 젊은 사람들을 이길 수 없기에,
    그들이 주장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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