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의 신화

며칠전에 미국에서 일하고 온 친구를 대학동기들과 만났습니다. 일하고 온 친구뿐만 아니라 모두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하고 온 친구가 미국 배관공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이 새서 배관공을 불렀는데, 이 친구가 퇴근시간이 되자 일도 안 끝났는데 집에 가버리는 거야. 말이 안 통해서 별 이야기 안 했지만 조금 황당하더라고.

이 이야기를 듣고 저와 제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첫 번째 반응은 ‘역시 미국 배관공은 살만하구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반응은 ‘먹고 살만하니까 서비스가 개판이다’는 것, 마지막 반응은 ‘역시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

오늘 ‘한국인 최장노동은 상사눈치 때문’이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OECD가입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2357시간으로 노동시간이 가장 긴데, 그 이유가 상사눈치를 보느라고,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회사에서 머물기 때문이랍니다. 이 기사가 통계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난 직장생활을 돌이켜 보면, 제 경험상 상당히 그럴 듯한 기사입니다.

직장에서 MBO를 세우고, 객관적으로 인사평가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연말 인사고과는 정량적인 실적보다 직장상사와 정성적인 관계에 의해 평가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근면이라든지, 성실이라든지, 조직 충성도라든지, 상당히 주관적인 평가지표에 의해 평가를 받고… 결국 이런 주관적인 평가가 남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리자가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느냐죠.

6시에 모두 일을 마치고 칼퇴근을 하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지만, 연대의식이나 장치가 없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은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기에, 상사눈치 보기라는 경쟁체제에 돌입할 수 밖에 없는 듯합니다. 즉, 괘씸죄라는 명목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대한민국은 OECD가입국 최장노동시간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고객 불편은 관심도 없는 미쿡 배관공의 직업의식이 옳은지 그른지 단죄할 생각은 없습니다. 즉, 저도 최장노동시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저도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본 경험이 있기에).

다만,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퇴근하는 동료를 향해, 겉으로든 속으로든 ‘저 친구 요즘 살만하군’이라는 말을 되뇌이는 직장인이 줄어든다면, 대한민국은 조금 더 여유로운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게 쉽지만은 않죠.



About the Author

Hani

This is Hani! My job is consulting, system design and project management... Sometimes coding. I hope you have a great time on my blog.

12 Responses to “칼퇴근의 신화”

  1. 아크몬드 Says:

    아직 직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네요..ㅎㅎ
    군대처럼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칼퇴근의 ‘신화’는 이루기 힘들 것 같습니다

  2. Hani Says:

    아크몬드님.
    아직도 노동강도가 높지만, 예전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

  3. I'm Sure Says:

    중국의 버스기사는 6시가 되면, 타고 있는 손님더러 다 내리라고 퇴근 합니다.

  4. eslife's me2DAY Says:

    사진찍는프로그래머의 생각…

    칼퇴근의 신화 - 1주일에 한번 칼퇴근할까 말까 한데.. 그나마도 눈치 보여서 칼퇴근은 거의 포기하고 살고 있슴다. 다른 분들은 괜찮으신가요….

  5. 오사카 Says:

    일본(오사카)에서는 기본근무외의 시간은 무조건 잔업수당으로 지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계약조건에 따라서 월 180시간이상부터 지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모든 회사가 잔업수당지불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잔업을 많이 하는 저의 프로그래머들에게는 의욕상승효과가 있는듯… 물론 퇴근시에도 상사 눈치보는 경우는 적은듯… 합니다.

  6. gourri Says:

    칼퇴근 신화를 이루기 위해 상사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정해진 시간에 거의 퇴근하는 편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제 업무는 칼 같이 처리합니다.

  7. 김성훈 Says:

    울산에는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의 특수성으로 외국인 사택이 존재하는데, 거기서 전화선을 교체하는 작업의 인부로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나라 사람을 경험했는데요, 미국사람으로 보이는 집에서 작업하다가 6시를 넘긴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6시10분쯤에 도착해서 궁시렁 거리면서 나가라고 하더라구요… 한 5분만 더하면 마치는데, 영어를 못하기도 했었지만, 그거 때문이라기 보단, 우리때문에 자기 개인 시간을 뺏기는걸 싫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칼퇴근을 바라는것은 의식이 바뀌지 않는한 어려울것 같습니다

  8. 서민당총재 Says:

    호주 농장에서 외국인노동자로 근무할때 첫날 어리버리까서 퇴근시간에 눈치를 보고있었는데 3시15분이되자 진짜 초칼퇴근을 하더군요. 늦게 온다고 엄청난 눈치를 받았습니다. -ㅁ-;;
    일못하는건 용서되도 퇴근시간에 삐대는건 용서 못하더군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진짜 초스피드로 날아갔죠~
    정말 칼퇴근 좋더군요~ 후후후~

  9. 이상훈 Says:

    동감합니다. 상사 눈치!

  10. Hani Says:

    I’m Sure님.
    버스기사가 그렇다니, 조금 당황스럽군요. :)

    오사카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도 좋은 상황인데…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을 반드시 줘야 한다면,
    우리나라도 바뀌겠죠.

    gourri님
    직장인이 업무시간에 집중하는 게 칼퇴근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선행되어야겠죠. :)

    김성훈님
    네, 말씀하신 것처럼 칼퇴근도 일종의
    생활습성인 듯합니다.

    서민당총재님
    저도 호주에 관광차 갔었는데, 잠깐 머무른 기간에도
    말씀하신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6시 이후 왠만한
    상점은 문을 닫고, 대도시 시드니도 조금 한가하더군요.

    이상훈님
    눈치를 안 주는 pm이 되어야 하는데요. ^^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11. toracle's me2DAY Says:

    toracle의 생각…

    다만,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퇴근하는 동료를 향해, 겉으로든 속으로든 ‘저 친구 요즘 살만하군’이라는 말을 되뇌이는 직장인이 줄어든다면, 대한민국은 조금 더 여유…

  12. 배고픈바보 Says:

    칼퇴근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보통의 일은 아니라는 거죠. 배관공이 됐건, 24시간 영업하는 마트가 됐건, 나하나 편하자고 남들에게 불편과 불합리를 요구하면 그게 결국은 돌고 돌아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같아요.

Leave a Reply

가끔 스팸차단기에 의해 코멘트(트랙백)가 막히나, 하루에 한번씩 정상처리 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