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가시의 저주?
Monday, February 28th, 2011예전에 전자 제품의 기구물 설계 컨설턴트로 활동했을 때 일입니다. 오래 전 일이라서 잘 생각나지 않지만 전자 제품 설계를 분류할 때, S등급 A등급 B등급 C등급으로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S등급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들 때죠. 예를 들어 일반 냉장고만 있을 때 김치 냉장고라는 개념의 제품을 만든다면, 이건 S등급 프로젝트입니다. 몇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겠죠. A등급은 일반 냉장고인데 새로운 기능이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자면 냉수기나 얼음 제조기를 냉장고에 붙이는 경우겠죠. B등급은 외관이나 세세한 기능이 바뀌는 경우고요. C등급은 흔히 말하는 제조 단가 절감을 위해서 부품이나 재료를 바꾸는 경우입니다.
그 당시 제가 컨설팅을 맡은 팀은 C등급의 제품을 만드는 곳이었죠. 설계자들이 대부분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설계를 잘하지 못했고 CAD를 잘 쓸지 몰랐습니다. 그 팀에서 고참 사원 한 명이 있었는데요. 프로젝트 일정 챙기느라 다른 부서 상대로 업무 처리하느라 설계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고참 설계자가 월요일에 신입 사원들에게 일을 주고 금요일에 실적을 챙겼죠. 전 주중에 설계자들이 CAD를 잘 써서 설계를 잘 하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설계자들을 도와주는 일 말고 다른 일도 있었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을 많이 봐주지는 못했습니다.
며칠 일이 있어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다른 곳에 업무를 하다가 신입 사원들이 설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금요일 업무 회의 시간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회의에 들어 갔을 때 마침 고참 설계자가 신입 사원들이 설계한 것을 잠깐 체크했는데요, 신입사원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고참 설계자가 화를 냈습니다.
이 구멍을 이렇게 크게 뚫으면 어떻게 해? 이 구멍이 뭔지나 알어?
환기구 아닌가요?
환기구 맞는데, 이걸 무작정 이렇게 크게 뚫으면 어떻게 해!
구멍이 크면 열이 더 잘 빠져 나갈 것 같아서요.
구멍이 크면 열이야 잘 빠져 나가겠지, 하지만 얘들이 그 구멍으로 젓가락이라도 집어 넣어서 감전이라도 되면 어떻게 할래?
……
도면만 그릴 생각하지 말고, 선배들이 어떻게 설계했는지 좀 보라고.
신입사원이 맡은 건 전자제품의 백커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백커버의 환기구(Ventilation hole)를 설계하는 일이었는데요, 열이 잘 빠져나가라고 환기구를 크게 설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크게 설계해서 아이들이 그곳으로 이물질을 넣어서 감전 당할 위험을 초래했습니다. 고참 설계자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탓인지, 평소보다 과하게 화를 냈습니다. 저도 일이 있어서 설계자들을 도와주지 못했지만, 야단을 맞는 신입사원을 보니 조금 미안하더군요.
조직이 성장하면 조직에는 방대한 데이터가 쌓이게 됩니다. 그런 데이터가 지식으로 정리되는 경우도 있고, 사람의 노하우로만 있을 때도 있습니다. 조직의 경험을 암묵지에서 형식지로 전환하지 않으면, 암묵지를 습득한 조직원이 떠났을 때 그 노하우도 떠나 버리죠. 그래서 우리는 암묵지를 형식지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노하우가 형식지로 축적되어 있어도, 조직원들이 그 속에서 쉽게 의미있고 도움이 되는 지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 경우가 아마도 환기구를 지나치게 크게 뚫은 신입사원에 해당하겠죠. IT분야 최고의 클래식 가운데 하나인 ‘The Mythical Man-Month’의 프레더릭 브룩스 교수가 쓴 최신작 ‘The Design of Design: Essays from a Computer Scientist’를 읽어 보면, 우리가 선배들이 만든 설계를 봐야 하는 이유가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과거의 설계 결과를 살펴 봐야 하는 이유는, 과거 설계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설계가 왜 실패했는지 알기 위해서다. 이런 것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
우리 선배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만든 산출물, 설계나 코드 아니면 요구사항이든, 이런 것들을 흔히 레가시(legacy), 즉 유산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것을 습득하거나 아직 경험이 미숙한 상태에서 현재의 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레가시를 무시하고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선배들이 경험한 실패를 다시 반복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레가시를 무시했을 때, 선배들의 실패를 재생하게 되는데요. 전 이런 상황을 ‘레가시의 저주’라고 부릅니다. 조금 무시무시한 표현이라도, 레가시를 잘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직에 들어갔을 때 이런 레가시의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선배들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레가시의 저주를 받지 않을려면요. 하지만 이런 후배 사원들이 레가시의 저주를 받지 않게 잘 도와주는 것도 선배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죠.
결국 레가시의 저주는 후배들이 저지르는 실수지만, 그 근본 원인을 살펴 보면 레가시를 잘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조직화하지 않은 선배들의 탓도 있습니다. 결국 어떤 조직에서 레가시의 저주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건, 참 불행한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