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with Hani

로망은, 실현되리라!

Archive for January, 2006


Cost Note

Thursday, January 12th, 2006

Death Note라는 만화를 아는가?

요즘 세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공포, 추리 장르의 일본 만화로, Oba Tsugumi 쓰고 Obata Takeshi가 그렸다. 다음은 Death Note의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는 컬럼이다. (원글 : 예스 이십사, 김봉석, 만약 내가 데스노트를 줍는다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데스 노트’를 주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데스 노트에 얼굴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정말로 죽어버린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데스 노트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당신이 미워하는 자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데스 노트를 불태워버릴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신은 어떤가.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데스 노트로, 이 썩은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되는 것이다.

사신 류크가 인간계에 내던진 데스 노트를 주운 것은, 17살의 야가미 라이토다. 야가미 라이토는 데스 노트의 힘을 알게 된 후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세상에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범죄자들을 하나둘씩 죽여 나가면, 언젠가 세상 사람들은 알게 된다. 누군가가 범죄자를 죽이고 있고,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럼 누구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되고, 세계는 확실하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거야. 내가 인정한 성실하고 착한 사람만의 세계를 만드는 거지. 그리고 난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된다.” 라이토는 그 엄청난 계획을 정말로 실행에 옮기고, 눈치를 챈 경찰에서 수사를 시작한다. …

이 만화의 핵심은 Death Note에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라이토가 살인 대상의 이름과 얼굴을 알려고 여러 묘안을 내놓는 것을 보는게 이 만화의 핵심 재미 중에 하나이다. 재미있는 점은 Death Note를 소유한 사람은 사신과 거래를 통해서 사신의 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신은 사람들의 이름과 예상 수명을 볼 수 있는데, 사신의 눈을 갖게 되면 만화의 말 풍선처럼 사람 머리위에서 그 사람의 이름과 실제 수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Death Note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남은 수명의 반을 사신한테 주면 사신의 눈을 갖게 된다. Death Note 소유자가 사신의 눈까지 소유하게 되면 단지 사람의 얼굴만 쳐다 봄으로써 Death Note의 살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만일 경영자나 관리자가 개발자가 회사를 떠났을 때 발생하는 손실을 볼 수 있다면 IT업계의 채용 관행은 어떻게 변할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Death Note의 사신의 눈처럼 개발자 머리 위에 그 개발자가 회사를 떠났을 때 발생하는 비용적 손실이 표시되고 오로지 관리자와 경영자만이 해당 개발자의 퇴사로 인한 손실 비용을 본다면 … 여기서 다시 예전의 드래곤 볼의 스카우터라는 장치가 생각난다. 손오공이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얼마나 쎈지를 볼 수 있는 기구다. 손오공과 일부 캐릭터는 자신의 공격력을 숨이고 있다가 실전에서 기를 발산하면 스카우터에 표시되는 공력력이 점점 증가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다 공격력이 스카우터의 표시 능력 밖에 도달하면 “펑” 소리와 함께 스카우터가 터졌던 것을 기억한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와서, 어느 순간부터 인사부라는 말이 사라지고 HR(Human Resource) 관리 부서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HR의 긍정적인 의미는 인력도 기업의 중요 자원으로써 관리하겠다는 뜻이고, 다소 부정적으로 보면 인력도 교환 가능한 자원으로 본다는 뜻이다. 즉 어제의 Java 프로그래머 개똥이는 내일의 또다른 Java 프로그래머 소똥이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과연 오늘 수명을 다한 두꺼비집의 휴즈가 새로운 휴즈로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개발자는 어제의 개발자처럼 일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개발자 퇴사와 신규 개발자 채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용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앞서 등장한 개똥이와 소똥이의 일화를 좀 더 살펴 보자. 어제까지 열심히 일하던 Java 프로그래머 개똥이는 상사와의 Trouble로 인해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물론 개똥이의 무책임한 태도도 문제였지만 오랜 시간동안 개똥이에게 과중된 업무로 이런 날이 올 것이 예견되고 있었다. 개똥이의 갑작스런 퇴사 통보로 프로젝트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개똥이의 상사이자 프로젝트 관리자인 P 팀장은 HR 부서에 급하게 신규 Java 프로그래머 투입을 요청했다.

개똥이가 몸 담고 있던 회사는 중견 SI업체로 항상 신규 인력의 끊임없는 지원으로 개똥이 수준의 실력을 지닌 소똥이라는 신규 Java 프로그래머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각종 사이트에 신규 인력 공고와 여러번의 면접을 봄으로써 신규 인력 채용에 신규 비용이 발생하였다. 천우신조로 소똥이를 얻게 된 P 팀장은 당장 현업에 소똥이를 투입했다. 물론 개똥이만큼의 개발 효율을 보이길 원하면서 …

그러나 소똥이는 개똥이의 자리를 쉽게 메꿀 수 없었다. 물론 개똥이가 갑자기 회사를 떠나기는 했어도 CMM 3레벨에 맞추어서 각종 개발 문서를 만들었고, Subversion과 버그질라 등의 툴로써 형상 관리와 품질 관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참고 자료는 충분히 있었다. 문제는 소똥이는 그 많은 자료를 처음부터 훝어 봐야 했다는 점이다. 소똥이가 똑똑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신규 개발자이기 때문에 회사의 문화와 각종 프로세스도 낯설었으며, 새로운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기존의 팀원들에게 물어봄으로써 팀원들의 개발 시간을 방해하였다.

어찌 되었건 개똥이의 갑작스런 퇴사 이후 소똥이의 부단한 노력과 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개월만에 소똥이는 개똥이의 개발 효율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2개월간의 Delay가 발생하였고, P 팀장은 명시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D-day를 지킬 것을 강요함으로써 소똥이의 개발 품질을 떨어트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똥이가 개발 납기를 지켰던 것은 아니다.

이상은 S/W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항상 접하는 일상사(?)이다. 그럼 여기서 발생한 정량적 정성적 손실 비용을 계산해 보자.

개똥이 퇴사로 인한 손실 비용 =
신규 인력 모집 공고 비용 +
면접 비용 +
소똥이 학습 비용 +
소똥이 지원으로 인한 팀원들 작업 손해 +
개발자 교체로 인한 개발 납기 지연 +
품질 저하로 인한 비용

이상이 개똥이의 퇴사로 인한 정성적, 정량적 비용이며 개똥이가 가지고 있는 능력 및 네트웍적 가치는 제외하였다. 단순히 생각하면 한명의 개발자가 바뀜으로써 들어가는 비용은 모집 시 들어가는 비용과 초기 교육에 들어가는 교육 비용 정도이다. 하지만 개발자 교체에는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엄청난 손실 비용이 발생한다.

만일 이런 비용이 개발자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고, 관리자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의 경영자들이 이런 비용을 볼 수 있다면 개발자 퇴사를 쉽게 생각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렇다고 급변하는 사업 환경 속에서 구조조정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다만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동감하지만, 단순히 개발자를 내보내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애기냐구?

이처럼 개발자 퇴사에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뽑을 때 신중히 해야한다. 특히 사람이 자본의 전부인 IT 기업의 경우, 임직원 채용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일 시간이 없어서 혹은 잘생겨서 학벌이 좋아서라는 이유로 인력을 채용한다면, 언젠가는 순간의 선택에 앞에서 설명한 손실 비용을 지불해야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람을 뽑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개발자를 당신 회사의 일원으로 삼았다면, 그가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리드해 주어야 한다. 즉 지속적인 학습의 분위기를 형성함으로써, 직원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신규 지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자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명목 아래에 기존 인력을 떠나 보내야 한다. 이럴 때에는 특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 만일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개발자를 떠날 볼 때는 구성원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또한 그 이유가 명백하다 하더라도, 떠나는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고 제 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떠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지켜 보는 남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오랜 시간 회사에 충성을 받쳐 왔던 이들이 헌신짝처럼 내 쫓기는 것을 본 직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바로 저 모습이 얼마 후 나의 모습이구나! 라는 끔찍한 상상을 품게될 것이다. 따라서 떠나는 이를 따뜻하게 보내 주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안정적인 새출발을 보면서, 언제가 다가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현재 업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 IT는 좋게 평가해도 사람 장사고 나쁘게 말해도 사람 장사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관리자나 경영자 집 앞에 Cost Note라는게 떨어져 있길 바란다. 그 노트를 주은 사람은 그 노트에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그 사람을 잡음 없이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신의 눈을 가진 이들은 그 개발자가 떠났을 때 손실 비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그 노트에 개발자의 이름은 적을 수 없을 것이다.

Paradigm shift! 1/2

Thursday, January 5th, 2006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아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거기 T-shirt 입고 계시는 잘 생긴 남자분.
답이 뭐라고요? 내? 우리 나라 말을 못한다라구요? 장난 하지 마시고요.

그럼 저기 안경 끼신 매력 있는 여자분. 답 한번 말해 보실래요?
내 맞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Break the Truth” 입니다.

“Break the Truth” … 즉 19세기까지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것을 산산히 부서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과학의 Paradigm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톤 역학의 절대 좌표와 절대 시간의 개념을 상대 좌표와 상대 시간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 수준에서는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관찰 대상의 위치와 속도는 확률적으로 밖에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기존의 고전 역학에서 전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알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였습니다.

이 이론과 원리가 과학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렇게 손가락에 힘줘서 Typing하는 걸까요? 바로 19세기까지 서구 이성을 지배하던 뉴톤 역학, 즉 고전 역학에 종지부를 짓고 인류의 사고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F=ma의 뉴톤 역학식을 E=엠씨스퀘어 수험생용 학습 촉진기계로, 근엄한 신을 카지노의 야바위꾼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불확성 원리를 비웃으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까? 하이젠베르그가 강원 카지노 랜드에서 도박하고 있는 신을 봤다는데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불확정성의 원리 모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두 이론에 대한 입문서로 괜찮은 책을 Post 끝에 적어 두겠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알지 못하신 아쉬움을 책으로 달래길 바라면서, 오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수학 좀 했다고 하는 사람도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수학 좀 많이 했다는 의미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성의 정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증명 과정이 워낙에 복잡해서 포기한지가 오래 전입니다. 다만 불완전성의 정리의 수학사적 의의와 그 의미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어서 잘 알고 있지요. 혹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문서(?)로 괜찮은 책을 Post 끝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학이 수학 자체의 학문으로 독립한 독립 기념일은 언제일까요? 수학이 나라도 아닌데 무슨 독립 기념일 타령이냐구요? 제가 생각해도 좀 쌩뚱 맞지만, 조금만 참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질문에 바로 답을 드리기 전에 이념적 수학 혹은 수학의 이념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념적 수학에 대해서 잘 정리된 이진경氏의 “수학의 몽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부분을 간추려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통적인 수학은 기하학과 대수학으로 크게 나누어 말할 수 있다. 기학학이 도형을 작도하여 문제를 풀거나 어떤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대수학은 그것을 숫자로 풀거나 증명하려 한다. (Hani 주 : 많이들 풀어 본 연립방정식이 대수학의 예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기하학적인 문제를 숫자로 환원하여 수를 통해 풀거나 증명하도록 했다. 이것을 ‘기하학의 대수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러한 발상이 단지 말 그대로 ‘수학’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당시에는 천문학, 음악, 광학, 역학 및 다른 학문들도 수학의 분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천문학이나 역학 등이 수학으로 취급되는 것은 그것이 수학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알기에, 또 거기서 요체가 ‘수학화’라는 것을 알기에 자연스럽다. 아마 뜻밖인 것은 음악일 것이다.
음악이 수학의 일부였던 것은 그리스 이래 서구 음악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악기의 현을 반으로 자르면 음정이 한 옥타브 올라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음악적 소리란 기하학적 선분의 비례관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에 비로소 확고하게 자리잡은 서구 음악의 음계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흐의 < 평균율 피아노 곡집>으로 더 유명한 ‘평균율’은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음들 간의 관계를 수학적 비례관계에 기초해 평균화해 놓았다. 즉, 음악에서도 소리의 수학적인 질서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음악이 천문학이나 역학과 더불어 수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미술 역시 서구의 그대적 전통은 수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 르네상스의 만능인 알베르티는 미란 수학적 비례의 문제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런 비례에 따라 세계를 아름답게 그리는 데는 투시법이라는 방법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수학적 비례관계를 연구하고 해부학까지 연구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투시법은 17세기에 들어와 역으로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의 모태가 되었다.
요컨데 계산가능성의 추구라는 서구 근대의 근본적 방향은 수학이나 과학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제한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방향이 천문학, 음악은 물론 모든 학문으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이러한 생각은 라이프니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프니츠가 자연법의 이론가로서 ‘법(Gesetz)’에 대해 말할 때, 그리하여 인간들의 관계가 그러한 자연법에 따라 배열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법’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민법’ ‘형법’ 혹은 ‘헌법’ 등을 떠올리게 하는 법이기 이전에 수학적인 ‘법칙(Gesetz)’이었던 것이다. … 동시대의 철학자였던 스피노자(B. Spinoza)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인 < 윤리학>에서 자기 주장을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배열하고 기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 데카르트는 “순서와 척도에 의해 연구되는 모든 것은 수학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을 그는 ‘보편수학’이라고 불렀다. 보편 수학이란 단지 하나의 수학 분야가 아니라, 계산 가능한 모든 질서에 대한 학문이고,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라이프니치가 크게 기여한, 데카르트 평면 내지 데카르트 좌표라고 불리는 계산공간의 탄생이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편수학은 모든 것을 숫자와 계산의 질서 아래 포괄하려는 ‘수학의 이념’이요 이상이다. 자연이나 사물은, 혹은 사유는 이제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게 해주는 그 계산공간 속에서 질서는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것에 숫자와 척도를 부여하여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이념적인 수학’이다.

이념적 수학이라는 항목에 Post의 많은 량을 할당한 것은 오늘의 주제 이해를 위해 수학사에 대한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수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이념적 수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수학은 수학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 18세기에 보편적인 수학으로 맹위를 떨친 수학이 19세기에 들어 오면서 그 지위를 잃자, 절대 진리의 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즉, 하나의 진리 체계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수학적 시도를 살펴 보죠. 유클리드 기하학,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180도가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180도 보다 작거나, 큰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출현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수학의 견고성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리스 이후로 서구 이성이 절대 진리라 믿었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뇨! 유클리드 기하학을 신봉하는 수학자들에게는 큰 일이 생긴거죠. 클라인이라는 수학자는 곡률이라는 개념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간극을 매웠습니다. 즉, 만신창이가 된 유클리드 기하학을 버리고 추상대수학 이론을 창안함으로써, 수학의 불변성을(진리) 구해낸 것입니다.

19세기 수학의 다른 측면으로는 공리주의의 대두를 들 수 있습니다. 수학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수학이 미인도 아닌데 무슨 아름다움이 있냐구요? 우리가 미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미의 완벽함이 아닐까요?(물론 미학을 논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도 언급만 하죠.) 마찬가지로 수 많은 천재들이 수학에 매료 당하는 것은 수학이 지니고 있는 지적인 완벽함에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견고하게 설계되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태엽 시계처럼, 수학이라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확고 부동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19세기까지 수학의 역사는 이런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허사임을 증명해 주는 일련의 사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많은 수학자들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매끄러운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으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으로 추상대수학의 성으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또한 실수론의 세계에서 평온히 살고 있던 수학자들에게는 해석학의 출현으로 갑작스레 나타난 무한소와 무한수의 괴물로 집합론의 신세계로 탈출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집합론의 세계에서도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칸토어 박사가 집합론의 신세계로 수학자들을 인도했지만, 그 세계는 수학자들이 수학의 절대성과 이별하는 신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19세기에 공리주의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는, 당시까지 수학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일련의 노력들이 허사가 되자, 추상의 원론으로 되돌아가 수학의 절대성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힐베르트 학파의 공리 주의는 모든 수학의 이론은 몇 개의 공리에서 출발해서 추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임의의 점과 다른 한 점을 연결하는 직선은 단 하나뿐이다.
2. 임의의 선분은 양끝으로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직각은 모두 서로 같다.
5.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2직각(180。)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을 연장할 때 2직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위는 유클리드 기학학의 공준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섯번째 공리는 앞의 4개의 공리와는 다르게 정리에 가깝습니다. 즉 2000년 가까이 수 많은 수학자들이 다섯번째 공리에(평행성 공리) 의문점을 가지고 4개의 공리를 이용하여 평행성 공리를 증명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체계처럼, 특정 공리 체계에는 참이나 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써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공리주의자들은 일련의 공리를 통해 수학의 완전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신 괴델이 등장합니다. 괴델은 형식주의자로써 공리주의를 추구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심각한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자신이 시스템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요. 그럼 여기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괴델의 첫째 정리 :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무모순인 모든 공리계 A에 대해서, A에는 결정 불가능한 무모순인 모든 공리계 A에 대하여, A에는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이 존재한다. 즉 A 안에는 G또는 ~G를 A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명제 G가 존재한다.

좀 더 쉽게 풀어 쓰면 어떤 공리계에서도 공리계가 제공해 주는 공리만을 이용해서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해낼 수 없는 명제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명제를 ‘결정 불가능한 명제’라고 부르고요. 따라서 공리계의 완전 무결함은 상상 속에서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공리주의 밖에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공리주의를 극단으로 끌고 간 형식주의자, 괴델에 의해 증명 되었기 때문에, 당시 수학계에서는 엄청난 파장을 부른 것입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수학의 절대성에 죽음을 알리는 진혼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의 의의는 종결을 위한 파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파괴성에 있습니다. 2000년 이상 절대 진리로 믿어 왔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계는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고 내부 모순성이 있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역사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 평행성 정리를 바꿈으로써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즉,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우리가 절대 진리라도 믿었던 닫힌 수학의 사상계를 창조적 발전이 가능한 열려져 있는 지적 광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시 오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수학의 독립 기념일은 언제일까요? 답은 수학이라는 나라에 수의 즐거움을 돌려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가 세상에 소개된 날입니다.

자! 숨가쁘게 달려온 오늘의 Post를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제가 장황하게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소개해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하고 있는 S/W 개발 분야도 열려 있는 사상의 공리계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Post에 기약하면서,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읽어 볼 만한 책 :

특수 상대성 이론 - “아인슈타인과 뉴턴의 대화”, 출판사 : 해바라기
일반 상대성 이론 - “사고思考 뭉치 아인슈타인 엘리베이터를 타다”, 출판사 : 에피소드
불확정성의 원리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출판사 : 도서출판 홍
불완정성의 정리 -“괴델의 증명”, 출판사 : 경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