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번역서를 판단하는 “간단한 기준”
Saturday, July 29th, 2006예전과 비교했을 때, 요즘 번역되서 출판되는 IT 서적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벤처 열풍이 불었을 2000년 당시와 비교해서 IT 서적 시장은 많이 축소 됐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역량있는 번역자가 늘어나고, 철학을 지닌 출판사도 조금 더 늘어난다면, 우리나라 IT 서적 시장도 양만이 아닌 질적인 성장도 같이 추구할 수 있겠죠. 지금은 이런 역량을 쌓는 시기라고 봅니다.
모임 때문에 강남에 나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교보 문고에 들렸습니다. 책 사이를 헤엄치면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제 시선을 낚는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읽어 보고 싶었던 책이 드디어 번역서로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지 번역서를 기다리지 않고 원서를 읽으면 되지만, 무척이나 난해한 문장들이 난무한 책이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지적 중노동이 싫어서 책을 멀리 했습니다.
이런 게으름을 해결하는 좋은 수단으로 돈을 지불하고 번역서를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게으름을 해결해 줄 번역서가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몇 페이지를 읽어 봤습니다.
(버럭!)이런!!
원문의 충실도를 떠나서, 다소 무책임한 번역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의 사소한 티눈이 내 눈안의 들보보다 크게 느꼈지기는 하지만, 역자는 번역을 한게 아니라 해석을 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의 x가 치밀었습니다. 단순히 외국어를 우리나라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 번역의 전부가 아닙니다. 외국어를 우리나라 말의 문법과 쓰임새에 맞추어서, 진짜 우리나라 말로 옮겨 놓는 일이 진짜 번역입니다.
좋은 번역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많겠지만, 제가 좋은 번역서를 판단할 때 제일 먼저 보는 무척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안정효氏가 지은 ‘번역의 공격과 수비’(세경 출판)라는 책에서 소개한 번역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인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없애라.”가 오늘 말씀 드릴 좋은 번역서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럼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없애라.”가 무슨 뜻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단한 비유 하나를 말씀 드리죠. 꽃을 사랑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아름다운 화단이 하나씩 있습니다. 화단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이 있지만, 산만하기는 커녕 여러가지 색깔이 조화롭게 섞여서 우아한 멋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흉칙한 잡초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화단에 핀 잡초를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잡초를 보지 못합니다. 잡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잡초를 보는 사람들이 화단에 핀 잡초를 제거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땡볕에 있지도 않은 잡초를 뽑는다고 난리 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흘러서, 화단에는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이 피었고, 꽃이 섭치할 모든 영양분을 무성한 잡초가 독식해 버리자, 아름다운 꽃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서야 잡초를 보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키 높이 만큼 자라 버린 잡초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잡초가 우리나라 말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글의 내용에만 집중해서 쓰다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있을’, ‘수’, ‘것’입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공감하실 내용입니다. 혹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히신다는 분들은, 100자 정도의 짧은 글을 써 보세요. 일단 내용에 집중을 하시고 쓰신 다음에, 쓴 글을 읽어 보시면 무척이나 많은 ‘있을’, ‘수’, ‘것’을 발견하실겁니다.
이 단어들이 우리나라 말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영어의 영향이 큽니다.(대부분의 번역서가 영문화권 서적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외국어 서적을 영어 서적이라고 한정 짓겠습니다.) ‘있을’, ‘것’은 모두 영어를 번역하다 보면 ‘현재 진행형’이나 “1형식 문장의 주어와 보어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수’는 ‘can’을 번역하면서 피어난 우리나라 말의 잡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런 잡초는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방치해둔 잡초들이 결국에 화단에 핀 꽃을 말려 죽이듯이, 번역자들이 무책임하게 방치해 둔 ‘있을’, ‘수’, ‘것’은 지성의 화단을 병들게 합니다.
그럼 왜 ‘있을’, ‘수’, ‘것’을 잡초라고 할까요? 이 단어를 사용하면 번역이 무척이나 쉽습니다. 별 고민없이 영어를 우리나라 말로 바꾸는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번역의 공격과 수비’에서 나온 예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Man can be killed by the virus
이 문장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나는대로 옮겨 보면 “인간은 바이러스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다”겠죠.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고 보니 번역된 문장에서 잡초 한 포기. 즉, ‘수’가 눈에 들어 옵니다. 이렇게 영어를 우리나라 말로 옮겨 놓은 작업은 ‘번역’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그럼 사려 깊은 번역가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 할까요? 안정효氏에 따르면 “인간은 바이러스 때문에 죽기도 한다”로 번역해야 한답니다.
물론 번역은 정답이 하나뿐인 수학 문제와 다릅니다. 제가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번역문을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문장을 놓고 보면 어느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이해가 잘되는지는 아시겠죠? 이렇듯 ‘있을’, ‘수’, ‘것’은 보이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우리나라 말의 잡초입니다. 번역가는 이런 잡초를 제거해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만 잘해서 훌륭한 번역가가 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넌센스입니다.
여러분도 책장에 있는 번역서 가운데서 아무거나 꺼내서, 제가 말씀 드린 기준으로 한번 살펴 보세요. 아마도 수 많은 잡초들이 보이실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진짜 잘된 번역서에서 이 잡초들을 찾기란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