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기원 그리고 프로세스… 1부
Friday, October 27th, 2006
컴퓨터를 가지고 급하지는 않지만, 할 일이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 그다지 재미없는 경우가 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하던 일이 그런 성격의 일이었다. 문제는… “아! 재미없어. 잠깐 rss나 읽고 다시 하자!”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rss 삼매경에 빠져서, 키보드에 먼지 내려 앉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낸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뒷목이 뻐근해져야, 그 때서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옆으로 새는데 1초도 안걸리는 인터넷을 두고, 집중하기란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의 저자인 도널드 크누스 교수는 1990년 1월 1일까지만 이메일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일반 우편물만 사용한다. 그리고 3개월 한번씩 자신에게 온 우편물을 읽어 보는 batch mode로 답장을 한다고 한다. 즉,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 같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이 즉각적인 편리함을 줄지언정,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데 주적 수준이다.
도널드 크누스 교수의 메일 사례는 인터넷 기술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고, 주어진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드는 요즘 세태에… 결국 필요한 것은 대량의 정보 흐름이 아닌 적절한 정보를 차단할 수 있는 필터다. 음. 필터!
* 이 post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페이퍼뷰 방식으로 9월 1일 방영된 “공각기동대, Solid State Society”를 보았다. 촌평은… 극장판으로 개봉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스토리나 Visual한 측면에서 완성도를 보인 작품이다. Solid State Society(이하 SSS)를 관통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급속하게 노령화는 되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 조직을 떠나 프리랜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냐는 문제(소령의 문제), 엘리트를 잃은 조직이 규모의 경제로 엘리트의 공백을 메꿀 수 있냐는 문제(공안 9과의 문제), Stand Alone Complex의 다른 변주곡(네트웍에 형성된 무의식, 귀부노인), 그리고 shell 혹은 네트웍 어딘가에 존재하는 Ghost의 문제다.
여러가지로 나열은 했지만, 결국에는
에 관한 또 다른 공각기동대 이야기다.

하지만 SSS를 보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문제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의문이었다.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닌, 인간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서 유전자가 인간을 시간에 대한 매체로 활용한다는 주장이다. 자고 먹고 싸고 사랑하는 인간의 목적성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안전하게 미래에 전달한다는 데 있다는 뜻이다.
귀부노인의 문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단면을 보여 주는 예이다. 결혼이라는 속박이 싫어서 독신으로 혼자 살았지만, 늙고 병들은 노인들은 결국 간호넷에 접속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이 귀부노인들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평생 모아 놓은 재산이 국가에 환원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투영해 놓은 富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따라서 학대받는 아이를 유괴하는 일에 동참해서 자신의 호적에 학대받는 아이를 올린다. 귀부노인들이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는 이유는, 자신의 유산을 물려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장자 상속이라는 어찌보면 불합리한 제도를 수천년간 유지했다. 대륙을 소유한 황제부터, 조그만한 농사 지을 땅을 소유한 촌부까지 재산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장자 상속의 집착은 비슷하다. 인간은 크게 부와 자식을 남긴다.(물론 어떤 이는 지식을 남긴다. 어찌보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유전자를 넘어선 나라는 존재 흔적을 남기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도킨스의 주장대로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라고 했을 때, 인간이 자식을 남기기 위해서 치루어야 하는 댓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장자 상속에 집착하는 이유도, 자신이 이루어 놓은 부를 균할 상속이라는 형태로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박경철 부자 경제학)
결국, 인간의 존재적 이유를 돌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카미야마 감독이 생각한지 모르겠지만, 귀부노인의 문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한 면을 떠올리게 하는 씁쓸한 시퀀스였다. 즉, 공각기동대에서 묘사하는 기술의 발전은 인간으로 지닌 한계성이 하나씩 제거되는 현재의 진행형을 보여준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기술의 발달은 연약한 육체라는 갇혀있는 욕망들의 봉인을 하나씩 해체하고 있다. 결국 해체의 흐름은 거대한 질량의 움직임이기에 거역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유전자가 되었건, 종교적 존재가 되었건,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육체의 연약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拈華)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불립문자(不立文子)는 이심전심과 더불어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경에 중국의 선종에서 만들어진 말로 추정한다. 불립문자를 말 그대로 풀어 보면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문자가 건축물도 아닌데, 세우지 말라니… 불교라는 문맥 안에서 살펴 본다면 불립문자안의 문자는 단순한 말이 아닌 불경을 가리킨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말만 놓고 본다면 불립문자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세우지 말라)라는 불경스러운 뜻이다. 불경을 논하기 전에 다른 예를 하나 보자.
언어는 존재의 집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즉, 언어라는 집 속에서 존재가 사는 것이다. 혹시 그림이 그려지는가? 이 말을 놓고 그림을 그려보면, 사용하는 언어가 풍부하고 커다랗다면 이 언어의 집 속에 사는 존재는 풍요로울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언어의 집이 앞마당에 사는 개똥이 집만하다면, 이 속에 사는 존재는 얼마나 고단할지 상상이 되는가? 언어와 존재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다. 즉,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존재는 확장하거나 성장한다. 물론 본질은 언어가 아닌 존재에 있으나, 하이데거의 말 속에서 언어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이 부처님과 같은 강인한 정신력과 세상의 만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불경 읽기다. 즉,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문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 때가 바로 문자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다. 즉, 불립문자의 순간인 것이다.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순환은 불교라는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집 속에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학습 사이클이다.
깨달음의 길, 문자
살펴 보았듯이, 불립문자가 뜻하는 바는 문자의 무용론이 아니다. 즉,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자, 불경에 통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불립문자의 순간이 달리는 행위라면, 달리기 위해서 걷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하듯이, 걷는 방법인 불경에 통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서 불립문자는 문자에 매몰되는 일을 경계하라는 의미도 담는다. 문자는 깨달음이 아니다. 언어는 존재가 아니다. 문자는 일종의 깨달음과 존재를 나타내는 허상이다. 물론 존재와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서 문자가 필요하지만, 진정한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서 문자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S/W 개발에 있어서도, 불립문자의 문자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바로 S/W개발 프로세스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로세스는 S/W개발의 집”이다. 그러나 언어는 본질적이며, 선척적이다. 이에 반해 프로세스는 기능적이며, 후천적이다. 또한 언어를 잃는 순간 존재는 어둠에 갇히지만, S/W개발은 프로세스가 사라져도 더디고, 불확실하지만 진행된다. 이런 언어와 프로세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로세스와 문자(불경)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프로세스와 불경은 본질을 향해 가는 길이다. 불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본질이 아니지만, 비구들은 불경을 통해서 부처님의 법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S/W 개발 프로세스가 S/W의 개발의 본질은 아니지만, 우리는 S/W개발 프로세스를 통해서 모든 Stakeholder가 행복할 수 있는 S/W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우리가 S/W 프로세스에 알 수 없는 알레르기를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조직에 맞는 진정한 프로세스를 갖추고 실행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없는 경이 무의미 하듯이, 본질이 빠진 S/W 프로세스도 공허하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접할지 모르는 수 많은 프로세스들은 본질이 빠진 경전이었기에, 우리는 S/W 프로세스라는 말만 나오면 원인 모를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다. 화성인 아키텍트가 알 수 없는 화성식 아키텍쳐를 만들고 떠나듯이, 금성에서 온 프로세스 컨설턴트 혹은 CMMI 평가자들은 자기네 말로 쓴 금성인 프로세스 메뉴얼을 던져 주고 떠났다.
화성인 아케텍트, 금성인 컨설턴트
이제 남은 것은 화성인 아키텍쳐와 금성인 프로세스 메뉴얼을 양손에 쥔 안드로메다행 로켓을 만들어야 하는 지구인 뿐이다. 이 지구인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쥐고 있기에 로켓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구인은 화성인이 주고 간 아키텍트에 맞는 부품을 구할 수 없으며, 금성인이 주고 간 메뉴얼은 금성인의 말로 써놓아서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지구인 경영자는 이런 현실도 모른채 수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아키텍쳐와 메뉴얼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못 맞추는 지구인 개발자들을 질타한다.
금성인이 떠난 맑은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지구인 개발자는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빌어 먹을 금성놈들, 프로세스…”
CMMI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이 말에는(어느 면에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 많은 CMMI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지만, CMMI 레벨을 획득하기 위한 평가 프로젝트였지 CMMI로 프로세스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CMMI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프로세스 평가자지, 프로세스 개선자가 아니다. 평가자는 금성인들과 같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CMMI spec.을 들고 와서, 지구인의 프로세스를 금성인 프로세스로 만들어 놓고 간다. 또한 금성인이 와서 점수를 주기 때문에, 금성인 컨설턴트가 다녀간 지구인 조직은 CMMI 레벨을 취득한다. 지구인 경영자는 기뻐한다!
드디어! 안드로메다 로켓을 만들 자격을 얻었다!! 야호~
그러나 금성인 컨설턴트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읽을 수도 없는 수백 페이지의 규정집만 남았다. 이제 모든 짐은 지구인 개발자 두 어깨에 놓였다… 지구인 개발자에게 필요한 것은 CMMI 레벨이 아니다. CMMI를 통한 프로세스 개선이다. 개선은 금성인 컨설턴트가 할 수 없다. 지구인 스스로가 해야한다. 지구인만의 해탈에 이르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지구인 뿐이다.
해탈의 길
거짓된 말이 많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짓된 프로세스가 많다고 프로세스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참된 문자가 깨달음에 이르게 하듯이, 참된 프로세스는 진정한 S/W 개발로 인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