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pril, 2007


조직 경험의 내재화, 그리고 Agile Retrospectives

Sunday, April 22nd, 2007

Agile Retrospective 5 Steps

  1. Set the stage
  2. Gather Data
  3. Generate Insights
  4. Decide What to Do
  5. Close the Retrospective

From Agile Retrospecitves

Retrospective 뭐에 쓰는 물건인고? 

‘Retrospective’… 귀에 낯익은 단어는 아닙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회고전’정도가 될테지만, 요놈 앞에 ‘Agile’이 하나 붙으면, 번역하기 참 곤란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붙여서 번역해 버리면, ‘애자일 회고전’이 되어 버리니, 입맛이 살지 않네요. :)

이 포스트의 목적은, ‘Agile Retrospectives’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는 게 아니니, 이쯤에서 단어놀음은 옆으로 치워두죠.

‘애자일 회고전’이 되었건 ‘애자일 복기(復碁)‘라고 부르던… ‘Agile Retrospective’의 가장 큰 목적은, 애자일 방법에서 말하는 한 주기나 출시를 끝낸 후, 팀이 모여서 그 주기나 출시를 하면서 무엇을 잘했으며, 무엇이 나빴는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다음 주기나 출시에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논의하는 것이죠.

상당히 애자일(?)스러운 행위입니다. ‘Retrospective’ 앞에 ‘애자일’이 붙음으로써, 마치 ‘Retrospective’라는 행위는 ‘애자일’의 전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마치고 그 결과를 끊임없이 피드백받습니다. 물론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사유하는 사람도 있고, 무의식적인 수준의 피드백에 머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런 피드백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조직의 경험(개인 경험의 총합)이 조직의 자산으로 남기 위해서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문서화와 조직원의 내재화입니다.

문서화, 양날의 검

문서화는 경험을 문서로 남기는 행위죠. 물론 문서화는, 조직의 경험을 자산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런 문서화에는 두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지식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과 지식이 전달되기 위해서 ‘독서’라는 능동적인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제 경험을 봤을 때, 대한민국 정서의 문서화는, 가뭄철에 강아지로 밭갈기랑 비슷합니다. 물론 지나친 문서화가 지닌 패단도 있지만, 반대로 과도할 만큼 문서화를 꺼려하는 것도 ‘개인의 경험’이 ‘조직의 자산’으로 쌓이는 데 방해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합니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여러가지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성과주의가 ‘문서화’를 꺼려하는 큰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서화’는 ‘현재의 나’를 위한 것보다는, ‘미래의 나’ 더 나가서 동료, 조직 그리고 회사를 위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당장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고, 고객을 만나 물건 한개라도 더 팔아야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언제 볼지도 모르는 미래의 열매를 위해서, ‘문서화’라는 행위로 현실을 저당잡힐 수는 없죠.

조직원의 내재화

다음 post에서…

이름보다 이상한…

Sunday, April 15th, 2007

장면 #1 영화 ‘소설보다 이상한(Stranger than fiction)’

해롤드와 파스칼 사이에는 밀가루 투성이의 선반이 놓여 있었다. 

“파스칼씨, 급진적인 주장이시네요. 무정부주의자세요?”

“내가 어디의 멤버라고요?”

밀가루가 묻은 밀대를 잡은 파스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정부주의자 집단요.”

해롤드는 파스칼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해롤드씨, 무정부주의자가 집단을 이루나요?”

“그런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롤드는 선반에서 한 걸음 물러 섰다.

“그 사람들이 뭉친다고요?”

“… 모르겠네요.”

“무정부주의자가 뭉친다면,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지 않나요?”

장면 #2 아빠 개발자 맞아?

image from http://i.blog.empas.com/emptydream/29179897_450×690.jpg

인간은 뜻(의미)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기호)을 사용하지만, 기호 자체가 의미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생기는 많은 오해는, 기호와 의미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나라 사람과 인도사람이 ‘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 나라 사람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쌀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은 쌀알이 둥글고 굵으며, 끈기가 강한 ‘일본형’ 쌀을 떠올릴 것이며, 인도사람은 쌀알이 길며 끈기가 약한 ‘인도형’ 쌀을 떠올릴 것이다.

‘쌀’이라는 단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의 거리만큼 의미 차이가 존재하는데… 인간이 그럭저럭이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 아닐까?

이런 의미 차이는 이질적인 두 문화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문화권, 같은 사회에서도, 어떤 단어가 가리켰던 원래 의미에서 변질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한 변질된 의미는, 참된 의사소통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의미의 변질이 직업을 나타내는 기호에서 생기는 경우, 개인은 자신의 Identity를 상실하고 혼돈에 빠진다.

장면 #2의 만화는, 얼마전에 개발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많은 호응을 받은 이유가, 유명한 CF를 재미있게 패러디한 데 있겠지만, 개발자들의 이목을 끌었던 더 큰 이유는, 개발자의 현실을 정확하게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현실을 볼 때, 다양한 직업들이 만화나 CF 속의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개발자’라는 직업만이 만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다. 아울러 글로발 경쟁(?)에서 이기고, 더 높은 생산성을 내기 위해서(?) 하나의 역할만을 해서는 안된다는 시장 경쟁의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빠 개발자 맞아?”라는 아들의 질문에 혼란을 겪는 이유는, ‘SW를 개발하는 직업’이라는 알량한(?) 전문성이 사라진 현실에 있다.

‘개발자’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심하게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개발자’의 정당한 위치와 대우는 무엇일까라는 거대담론을 옆으로 치워두더라도, 회사 내에서 ‘개발자’라는 직군에 요구하는 전문성은 정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점도 그때 그때 다른 회사의 상황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만병 통치약’의 다른 이름은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경영층과 관리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학습된 무력감 에필로그

Sunday, April 8th, 2007

학습된 무력감 1
학습된 무력감 2 

매 한마리가 사냥꾼에게 잡혔다. 사냥꾼은 마당 한가운데 말뚝을 박아 매를 매어두었다. 매는 하늘로 날아가기 위해 수천, 수만 범의 시도를 했다. 그러나 밧줄 길이 이상으로 날아가지는 못했다. 그럴 때마다 땅으로 곤두박질치곤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밧줄은 풍상에 시달려 저절로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매는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아봐도 또 떨어질텐데.’

자신이 외부환경을 통제하지 못할 때에는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도를 포기한다.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무기력을 학습한 결과다. 그래서 이것을 ‘학습된 무력감’이라 한다.

유쾌한 심리학, 박지영, 파피에 출판

‘학습된 무력감’은 셀리그만(Seligman)의 회피훈련연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동물에게만 한정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학습된 무력감’은, 일련의 실험으로 인간에게도 적용된다고 밝혀졌다.

굳이 심리학 실험을 언급하지 않아도, ‘학습된 무력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경험한다. 신입사원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정적이다(물론 아닌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 ). 신입사원의 패기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직장 문화를 개선하자고도 울부짓지만, 관리자나 선배의 싸늘한 반응에, 사회가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시간이 흘러 일년 이년이 지나고 나면, 후배 사원이 들어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열정적인 후배의 모습 때문에, 후배의 면전에 대고 핀잔을 주지는 않겠지만, 다음처럼 되뇌이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학습된 무력감’은 환경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피실험 대상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학습된 무력감’이 내재화되는 순간은, 외부의 환경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리고 열정의 화신이었던 신입사원은, 더 이상 도전하지도, 환경이 바뀌었는지 살피지도,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 벽을 향해 돌진하는 무식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지금 당장 존재한다 하여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 속에서 세상을 보는 이치를 얻어야 한다.

나를 떨어트리던 물대포 사수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으며, 셀리그만의 실험 장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 깨어있는 두 눈이다. 그 다음은 기둥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약간의 용기다.

image from http://photo.net/photodb/user?user_id=2105885

일 잘하는 방법 1부

Saturday, April 7th, 2007

“김대리, 잠깐만!”

이과장은 프린트물을 김대리에게 건냈다.

“김대리, 해외 연구소 자료데, 퇴근 전까지 보고서 만들어 봐.”

“내? 퇴근 전까지요?”

“왜? 문제있어?”

“아뇨… 별 뜻은 아니고, 확인하려고 여쭤 봤습니다.”

“최이사님이 퇴근 전까지 보고 싶다고 지시하셨어.”

“내…”

“이 사람아. 어려울 게 뭐 있어. 프린트물 읽어보고, 잘 정리하면 되지.”

“…”

“최이사님 지시란 걸 명심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작성해 와.”

“내. 알겠습니다…”

김대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켰다.

관리자들 세계에서, 최이사 보고 자료는 농약 먹은 쥐라고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 생각없이 잡아 먹으면 죽고 마는 농약 먹은 쥐. 그 농약 먹은 쥐가 김대리 손에 놓여 있었다.

‘젠장, 골치 아프게 됐어.’

해외 연구소 2군데의 인터넷 사이트를 출력한 자료였다. 김대리는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프린트물을 읽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자료였기 때문에, 읽는 속도는 더디었다.

김대리는 프린트물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빌어먹을 읽기 읽었는데, 머리에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

김대리는 시계를 쳐다 보았다. 4시반이었다.

‘이런, 한시간 반도 안 남았어!’

김대리는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모르겠다. 일단 번역이라도 해 놓자.’

프린트물 위의 문장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작업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사무실의 시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는 혼란해지고, 프린트물의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대리의 약지(藥指)는 마지막 마침표를 눌렀다. 김대리는 서둘러 인쇄 버튼을 클릭했다. 출력된 보고서를 결재판에 담아, 이과장에게 재빨리 갔다.

“저… 과장님, 여기 지시하신 보고서입니다.”

“이 사람아, 좀 서둘러 하지! 퇴근 시간까지 하라고 말했다고, 6시에 딱 맞춰 가져오면 어떻게 해.”

이과장은 김대리 손에서 결재판을 낚아챘다. 보고서의 첫 장이 신경질적으로 넘어갔다. 김대리는 이과장의 이마를 쳐다 보았다. 이과장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김대리는 뒷목이 뻐근해졌다.

“김대리, 내가 보고서 만들어 오라고 했지. 번역해 오라고 했어. 최이사님한테 보고할 자료라고 말했잖아. 이런 식으로 작성하면 이사님한테 어떻게 보고해.”

“…”

“이 양반아. 회사 생활 하루 이틀 해봐. 뭐라고 말 좀 해.”

“…”

2부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