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노인
Friday, May 18th, 2007김씨는 작업복을 담은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전철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유난히 오늘 따라 전철에는 사람이 없었다. 김씨를 포함해 두 세 사람만이 서 있었다.
“디스 스테이션… 사당, 사당…”
브레이크 소리 때문에 안내 방송이 끊겨서 들렸다. 김씨 앞에서 졸던 젊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 앉으세요. 할아버지!”
젊은이는 머줍게 일어났다. 퇴근길에 김씨의 얼굴은 환갑을 넘긴 노안(老顔)이었다.
‘할아버지.’
김씨는 젊은이의 마지막 말을 되내이며 앞니 빠진 노인의 얼굴처럼 횅한 자리에 몸을 맡겼다. 김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전철의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할아버지? 그래 내가 할아버지가 아니면 뭐냐. 이제 쉰여덜이다. 내일모레면 환갑… 이 짓하면서 더 늙었다. 젠장 지겹다. 시불놈의 노가다 인생 집어치고 싶다. 집어쳐? 그럼 뭘 먹고 살지. 빌어먹을.’
김씨는 이를 악물었다. 화가 치밀었다.
***
“이번 내리실 역은 … 입니다.”
김씨는 요란스러운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전철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김씨는 닫히는 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렸다. 김씨 뒤로 문이 닫혔다. 승강장을 따라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있었다.
‘가방!’
전철은 승강장을 빠져 나가, 어둠 속으로 묻히고 있었다.
“젠장! 내 돈.”
김씨는 바지주머니를 뒤졌다. 왼쪽 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 한장이 나왔다.
‘이걸로 뭘 먹지? 라면? 시부럴 무슨 저녁이냐. 소주나 한잔 사먹자.’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임에도 겨울바람처럼 으스스했다. 천원을 바지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선로를 따라 굽은 승강장 끝에는, 개찰구로 이어지는 계단이 굶주린 뱀마냥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전철을 타고 내리던 승강장이 낯설었다. 김씨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김씨의 발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울렸다.
***
김씨는 계단을 내려갔다.
초췌한 노인이 지저분한 돗자리를 깔고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 김씨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노인은 김씨를 쳐다보았다.
’버러지 같은 놈. 뭘 봐?’
김씨는 속으로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노인과 가까워지자, 노인이 앉은 돗자리 위에 작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에는 ‘천원에 30년, 청춘을 돌려줌.’이라고 적혀 있었다.
‘등쳐먹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김씨는 무심코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노인이 김씨를 향해 입을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앞니가 하나 빠져 있었다.
“웃긴 왜 웃어? 별…”
김씨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삭히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이 김씨! 오늘은 그냥 가?”
노인의 목소리였다.
“김씨? 당신 나 알어?”
김씨의 목소리가 날카로왔다.
“아냐구? 알지. 아주 잘 알지. 손님을 몰라보면 이 장사도 못해 먹는다 말이야.”
노인이 다시 한번 입을 벌리고 웃었다.
“손님? 당신 오늘 처음 보는 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이 노인네가 사기 쳐먹을려고 작정했구만.”
“사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만복씨. 이름이 만복 맞지? 김.만.복.”
김씨의 눈이 훼동그라졌다.
“이 노인네가 남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 당신 뭐야. 나 미행하고 다니는 거야?”
김씨는 멱살잡이라도 할 것처럼, 노인에게 뛰어갔다.
“진정해~ 김씨! 그 놈의 성격은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나 봐.”
“이 노인네가 자꾸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김씨는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날 어떻게 아냐니까? 이 노인네야.”
“기…김씨. 이걸… 놔야지 이야기를 하던…말…던 하지.”
김씨는 손을 놓았다.
“내가 손님 몰라 보면 이 장사도 못해 먹는다고 했잖아.”
“이 노인네가 다시 혼날려고. 바른대로 말 못해?”
“자! 여기 모라고 써 있어? 천원에 30년. 청춘을 돌려줌이라고 써 있잖아. 내 밥벌이가 당신같은 사람한테 돈 받고 시간 파는 거란 말이야.”
“자꾸 헛소리하면 맞아!”
김씨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어허. 이 양반 성격하고는. 30년을 왜 단돈 천원에 파는 줄 알아? 김씨 당신에게 있는 돈이 달랑 천원이라서 그래. 바지주머니에 있는 그 천원 말이야.”
노인이 다시 한번 웃었다. 노인의 웃음이 아까와는 달리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 노인네가 사기 쳐먹을려고 작정했구만.”
“사기? 케케케.”
노인의 웃음소리에, 김씨는 소름이 돋았다.
“오늘도 가방 놓고 내렸지? 자넨 항상 그런 식이지.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이 자네한테 시간을 파는거야. 시간 없어. 빨리 말해 살거야 말거야?”
“뭘… 사?”
“시간 말이야. 단돈 천원에 30년을 돌려 받는다고. 이처럼 좋은 거래도 없지? 케케케.”
“미친 소리를 어떻게 믿어?”
“미친 소리? 그럼 안 사고 가면 되잖아.”
노인은 다시 입을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앞니 빠진 자리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천원에 30년을 돌려 준다고?”
“그럼, 그럼. 이제 믿기 시작하는군. 케케케”
“젊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냐구? 세상을 속고만 살았어? 다시 돌려주면 되잖아. 살거면 얼른 돈 줘. 나도 집에 가야지. 배고프단 말이야.”
‘이 노인네가 하는 소리가 진짜야? 아니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는 데 실컷 패주면 되지.’
계단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노인과 김씨 사이에 불었다.
“노인네야. 거짓말이면 각오해.”
“자넨 항상 돈을 줄 때마다 그 이야긴 잊지 않는단 말이야. 그 양반 말씀이 맞아. 인간은 변하지 않아. 하긴 그러니까 내가 먹고 사는거지. 알았으니까 빨리 돈이나 줘.”
김씨는 바지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을 꺼냈다. 노인은 김씨 손에서 천원을 낚아챘다.
“고마워! 다음에 또 보자고. 김씨! 케케케.”
노인의 웃음소리는 세상을 삼킬 듯이 점점 커졌다.
***
“디스 스테이션… 사당, 사당…”
요란스러운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만복은 놀라서 주위를 살피다, 앞에 서있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 앉으세요. 할아버지!”
만복은 머줍게 일어났다. 달콤한 잠에서 깬 만복은 입맛을 다셨다.
‘아! 지겹다. 집에 가서 뭐 하지? 잠도 잤는 데. 애들이나 불러서 놀아. 심심하다. 심심해.’
만복은 자리에 앉은 노인을 보며 생각했다.
노인은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었다.
영감을 준 J선임님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에필로그에서 계속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