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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은, 실현되리라!

Archive for May, 2010


[서평] Slack

Friday, May 7th, 2010

고등학교 시절 영어와 수학을 잘 하기 위해서, 제가 사용한 방법은 무조건 많이 외우고 많이 풀고 많이 써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능 1세대로서 암기 위주의 학습보다 창의력(?)이 중심이 되는 공부법이 필수였지만, 그래도 공부의 핵심은 암기와 연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부 방법으로 기출된 문제를 대부분 풀어 보았고, 유사한 문제는 풀 수 있는 능력이 되었지만, 단순한 공부량의 크기로만 접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수능 1세대이자 본고사가 부활한 세대였기 때문에, 본고사 준비도 해야 했죠. 본고사는 기출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대학의 본고사 기출 문제를 중심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 대학의 기출문제는 쉬운 것도 있었지만, 확실히 접해 보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문제는 2~3일을 매달려도 풀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며칠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으면, 제 능력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저를 괴롭힌 그 문제를 쳐다 보기도 싫어서, 옆으로 치워두고 지내거나, 아니면 놀았죠.

그런데 신기한 일은, 며칠이 지나고 그 문제를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 그냥 며칠 동안 그 문제를 쳐다보지 않은 게 전부인데, 한동안 저를 괴롭히던 문제가 그리 어렵게 보이지도 않고 상당히 쉽고 명확하게 보인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물론 끝내 스스로 해답을 알 수 없던 문제도 있었지만, 어렵던 문제들의 해답은, 답을 얻으려고 엄청 시간을 투자한 뒤, 지쳐서 한동안 옆으로 치워두었다고, 다시 살펴 봐서 얻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마술은, 시간이 흐른 뒤 뇌과학 측면에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죠. 즉 지나치게 학습에 집중하는 것보다 뇌가 학습한 것을 흡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나, 오랜 시간 공부하는 것보다 복습을 자주하는 게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제 경험을 뇌과학 측면에서 원인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경험 법칙으로 볼 때, 삶에서 ‘양’에서 ‘질’로 변환하려면, 전환점 비슷한게 필요합니다. 제 학습 경험처럼 미시적인 수준에서 학습에서 몰두하고, 그런 미시적인 수준에서 얻지 못하는 거시적인 관점을 얻으려면 학습이나 일에서 빠져 나와 전체를 봐야 합니다. 즉 ‘미시적인 수준’에서 몰입이 필요하다면, ‘거시적인 수준’에서 여유가 필요하죠. 다른 말로 하자면 ‘양’ 중심에서 ‘질’ 중심으로 변환하려면 일이나 직장에서 ‘여유’ 혹은 ‘빈둥거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면 현대 사회에서 미덕은 바쁨입니다. 즉 바쁜 사람이 유능하거나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죠. 물론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바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대개 유능하거나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냥 바쁘게 살아서 ‘양’에서 ‘질’로 변하는 전환점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바쁘게 사는 것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에 에너지를 쏟는 산만함의 바쁨이 아닌 한곳에 집중하는 몰입의 바쁨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런 몰입의 바쁨이 ‘양’에서 ‘질’로 변환하기 위해서, 전환점 즉 ‘여유’나 ‘빈둥거림’이 필요합니다. 몰입의 바쁨에서 수확한 것들에서 의미있고 창조적인 것을 뇌가 학습하고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직장이나 일상에서 여유나 빈둥거림의 중요함에 대해서 생각해 볼만한 책이 한권 나왔죠. 바로 톰 디마르코의 ‘Slack’입니다. 뭐, 즐겁게 읽으실 분들을 위해서 책의 상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 다만 책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조직에서 사람을 대체물로 본다는 관점의 한 가지 예로 매트릭스 조직이 나왔습니다. 책에서 매트릭스 조직을 비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매트릭스 조직에서는 사람을 대체물로서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에 배치합니다. 이렇게 배치된 사람은 일을 바꿔가면서 하기 때문에 작업 전환 비용이 발생하고, 이런 작업 전환 비용 때문에 정작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트릭스 조직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점임을, 저도 인정합니다. 다만 책에서 매트릭스 관리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제도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매트릭스 관리를 해악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매트릭스 관리에 있지만, 매트릭스 관리는 기능 조직에서 발생하는 부서간의 경쟁이나 프로젝트 중심으로 운영되는 조직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소속감 부재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왔죠. 물론 최근 도요타가 큰 실수를 저질러서 도요타의 개선 프로그램에 대한 환상이 깨졌지만, 도요타가 세계 제일의 자동차 회사로 등극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바로 매트릭스 관리에 있습니다.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이 정도고요. 이 책은 바쁨이 미덕인 우리네 정서에, 여유나 한가로움이 왜 필요한지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는 데 큰 가치가 있습니다. 최근 너무 바쁘게 살아서 뭔가 아쉬움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